[천자 칼럼] 아르헨티나의 비극
서울에서 땅 아래로 지구핵을 거치는 대척점에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있다. ‘맑은(buenos) 공기(aires)’라는 뜻의 이 도시에는 한때 아르헨티나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 수두룩하다.

부자들 묘역으로 유명한 ‘리골레타’도 그런 곳이다. ‘돌 건축 박물관’이라 해도 될 정도로 다양하고 장중한 가족 묘지들이 도심 요지를 버티고 있다. “그냥 남들 가는 대로 따라만 가시오.” “에바 페론 묘소를 보고 싶다”는 이국 방문자에게 현지 안내인은 퉁명스러운 이 한마디와 함께 고개를 돌려버렸다. 빗속에도 이어지는 참배자들과 묘지 앞에 쌓인 꽃다발에서 페론주의를, 포퓰리즘 정치의 잔해를 엿봤던 연전의 방문 기억이 새롭다.

아르헨티나발(發) 금융 불안이 또 불거지고 있다. 최근 한 달 동안에만 15% 이상 떨어진 이 나라 페소화 가치는 사상 최저로 추락했다. 1주일 새 세 차례나 기준금리를 올려 연 40%가 됐지만, 자본유출은 쉽게 진정될 기미가 없다고 한다. 그제 결국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것은 다른 탈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환율이 무너지면 다음은 인플레이션인데, 축구 좋아하고 탱고 즐기는 페론의 후예들이 버텨낼 수 있을까.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과거 ‘남미 좌파 벨트’의 친구였던 베네수엘라만 봐도 잘 알 것이다. 석유매장량 1위인 자원부국 베네수엘라는 차베스·마두로 좌파 정권의 실정으로 연간 물가상승률 1만3779%의 무정부 지경을 오래 헤매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반경 700㎞가 팜파스라는 대평원인 목축부국, 농업강국 아르헨티나는 어쩌다 다시 국가부도 사태를 맞았나.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만 13차례나 했을 정도로 부실한 재정이 문제다. 몇 년 전에는 가나로 원정 갔던 자국 해군함 3척이 압류당하는 굴욕까지 당했다. 요즘 한국에서 유명세를 날리는 헤지펀드 엘리엇의 채권행사 때문이었다.

해외자본 배제, 국유화, 무상복지, 보조금 확대 등 페론 부부의 포퓰리즘 정치는 그들 이후에도 지속됐다. 2015년, 기업인 출신 중도우파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 집권했지만 70년 페로니즘의 유산을 털어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나라 곳간털기는 금방이어도 건전 재정은 어렵고 고통스럽다. 침체된 경제에서 재정적자를 줄이려고 올린 공공요금 때문에 물가가 급등하는 식의 악순환이 반복됐다.

세대를 넘어가는 아르헨티나 포퓰리즘의 극단적 폐해를 뭐라고 해야 할까. ‘깊은 후유증’ ‘회복불능의 상처’ 정도로는 모자란다. 에비타에 열광했던 ‘페론 세대’는 그렇다고 치자. 페로니즘의 ‘위대한’ 유산을 받아든 지금 청·장년들은 전 세대를 어떻게 볼지…. 우리가 금을 모았던 것처럼, 그들은 팜파스 평원이라도 내다 팔까.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