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기의 데스크 시각] 트럼프의 축복, 서훈의 눈물
실패할 수 없는 회담이었다. 지난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한 정상회담은 물샐틈없을 정도로 잘 준비됐다. 남북 간 회담은 의외의 변수가 많아 서로에게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통상의 정상회담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의외의 상황도 자주 연출된다. 2007년 열린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회담을 하루 더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예정에 없던 제안을 불쑥 던졌다. 합의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우리 측을 압박하기 위한 의도였다.

'약속대련' 같았던 회담

이번에는 달랐다. 시작 전부터 청와대에서 이번 회담은 ‘약속대련’이나 다름없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일정은 물론 회담 의제와 합의문 초안까지 물밑에서 조율이 끝났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의 끝내기만 남겨뒀다. 청와대는 회담 전날까지도 ‘비핵화’는 빈칸으로 남아 있다고 엄살을 부렸지만 실제 분위기는 낙관적이었다고 한다.

비핵화의 기대치를 한껏 올린 탓에 김 빠진 맥주처럼 밍밍할 뻔하던 이번 회담의 분위기를 끌어올린 것은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이뤄진 단독회담이었다. 당초 일정은 판문점 습지 위에 설치된 길이 50m의 나무다리를 걸어서 산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정상은 다리 끝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30분간 배석자 한 명 없이 밀담을 나눴다. 다리를 오가는 시간을 합쳐 43분 동안 두 사람은 한 명의 배석자도 없이 속내를 나눴다. 의도된 연출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에는 충분한 그림이었다. 두 정상 목소리 대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새 울음소리밖에 안 들렸지만 CNN은 이 화면을 생중계했다.

두 정상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한다’는 문구가 담긴 ‘판문점 선언’을 도보다리 회담 전에 승인했다. 당초에는 이곳에서 ‘친교 산책’을 한 뒤 한 시간 동안 회담하고 나서 선언문을 발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오전에 일찌감치 선언문 초안과 문구 검토까지 마쳤다.

무엇보다 미국의 사전 동의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성공은 예견돼 있었다. 과거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기도 하다. 지난 1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종식하는 평화협정을 논의하는 것을 블레싱(blessing·축복)한다”고 밝혔다. 블레싱은 종교적으로는 은총이라는 뜻이지만 외교적으로는 ‘지지’를 의미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 결과가 발표된 직후 “한국전쟁은 끝난다”며 신속하게 축하 메시지를 올렸다.

이날 회담의 또 다른 인상적인 장면은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었다. 그는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었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이번 협상을 물밑에서 조율한 ‘키맨’이었다. 남북 정상의 공동선언문 발표를 지켜본 서 원장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은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의 표시였다.

'판문점 선언'에 취할 때 아냐

하지만 이번 회담은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예행연습이다. 진정한 승부는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자유대련’에서 판가름난다. 트럼프의 축복이 저주로 돌변할지, 서 원장이 또 한 번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과는 트럼프 대통령 말대로 “시간이 말해 줄 것”이다. 그때까지 약 한 달의 시간이 남았다. 한반도 위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남북 정상회담의 성공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