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남북한 정상회담’이 27일 판문점 남측 평화의집에서 열렸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남북한 정상 간 12시간의 만남은 ‘역사적’이란 수식어 외에 달리 붙일 말이 없다. ‘분단 70년’의 대립과 반목에서 탈피해 평화와 화해의 첫걸음을 뗐다. 두 정상은 “새 역사를 쓰는 출발선”(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라며, “통 크게 합의해 세계에 큰 선물을 주자”(문재인 대통령)고 의기투합했다. 한 달여 뒤 북핵 폐기를 논의할 미·북 정상회담에도 긍정적인 신호가 될 전망이다.

북한이 정상회담에 임하는 자세도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 주목을 끌었다. 북한 매체들이 이례적으로 ‘최고지도자’의 동선을 예고하고 정상회담 소식을 전했다. 정상 만찬에 김정은 이설주 내외가 함께 참석한 것도 전에 없던 일이다. 대화에 나서겠다는 김정은의 신년사 이후 북한 행보가 ‘불량국가’가 아닌 ‘정상국가’를 지향하는 듯하다.

이번 판문점 선언을 통해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 위험은 현저히 감소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쟁 트라우마가 여전한 남북한 국민으로선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평화선언도 확실한 이행이 담보되지 않는 한 평화를 장담할 수 없음은 역사의 교훈이다. 2000년과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때도 북한은 평화체제 구축을 약속했었다. 특히 2007년 회담 때는 문 대통령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지켜봤다.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이번 합의가 북한이 지난 25년간 되풀이해 온 핵·미사일 도발과 위장평화 공세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입증할 책임은 김정은 본인에게 있다. 하지만 북한 정권에 핵은 국제적인 주목을 끌며 ‘벼랑 끝 줄타기’를 벌일 수 있는 절대적인 수단이다.

대부분 전문가들은 쉽게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오히려 ‘핵보유국 완성’을 선언하고 대화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비핵화’와 북한이 주장하는 ‘한반도 비핵화’가 전혀 같지 않다. 따라서 감성적 접근은 금물이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그럼에도 이번 만남은 의미가 크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지난 70년간 치른 피와 눈물, 안보비용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렇게 허비한 국가 역량을 번영의 종잣돈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긍정적이다. 군사적 대치 완화 이후 교류 확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남북한이 군사경쟁이 아닌, 가치 경쟁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한의 체제 경쟁은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30배 차이가 날 정도로 오래전에 승패가 갈렸다. 북한이 비교우위에 있다고 내세우는 게 민족적 자주성(주체사상)이지만, 이 역시 북한 주민들에게도 동의받지 못한다. 끊임없는 탈북행렬이 그 증거다. 북한은 비핵화의 전제로 체제보장을 요구하지만, 체제의 최대 위협은 미국 등 나라 밖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 응축된 모순과 불만이 터진다면 정권 안보를 누가 대신 보장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북한이 맞닥뜨려야 할 불편한 진실이다.

그런 점에서 향후 남북관계에서는 대한민국의 가치를 수호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우리에게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세계를 향한 개방과 협력 그리고 법치와 인권 등의 가치가 있다. 이런 가치가 북한에도 전파돼야만 비로소 상호 번영과 평화를 이루고, 통일도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는 이런 가치를 부정하고 심지어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끄럽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고, 집권세력에도 일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치권력의 힘은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커진다. 이는 냉엄한 국제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남북관계 개선 못지않게 남남 갈등의 치유도 시급한 이유다.

이제 시작이다. 과도한 낙관도, 과도한 비관도 금물이다. 현실의 눈을 크게 뜨고 냉정하게 공존공영의 길을 하나씩 밟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