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과 시각] 銀産분리 고집할 이유 없다
지난 2월 하순, 학회 관련 일정으로 미국 실리콘밸리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캐피털 원(Capital One)이란 은행의 창구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캐피털 원은 출범 20년 만에 자산기준 미국 8대 은행으로 발돋움했는데, 놀랍게도 은행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운 복장의 핀테크 업체 같은 분위기였다. 전체 직원 5만 명 중 2만 명이 테크니션이라는 이 은행은 지점을 모두 없애고 그 자리를 카페로 만들어 고객들이 편히 이용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이런 모습에 겹쳐 우리나라 은행들이 떠올랐다. 이제 막 출범한 인터넷은행들이 이런 미국의 혁신은행처럼 단기간에 기존의 딱딱한 은행이란 ‘금융기관’ 프레임을 깨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017년 4월과 7월에 각각 출범한 인터넷은행 케이뱅크(K뱅크)와 카카오뱅크가 있다. 그러나 출범한 지 1년이 되지 않아 대규모 유상증자를 추진해야 할 상황인데도 은산(銀産)분리란 굴레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은산분리 규정은 이제 폐기되거나 최소한 완화돼야 한다. 그 이유로는 첫째, 그 자체가 너무 오래된 구시대 유물 같은 규정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형성된 금융자본 없이 외국자본을 빌려와 산업개발에 나선 우리나라는 덩치가 커진 산업자본이 금융까지 장악하게 될 가능성을 우려해 1961년 비(非)금융자본의 은행 진출을 막는 은산분리 원칙을 도입했다. 그동안 이 규정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재벌인 삼성과 현대그룹이 은행업에 진출하는 것을 막아왔다.

그러나 은산분리 규정이 이들 재벌이 국민의 예금을 사업확장에 활용하는 것을 완벽히 막았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들 재벌은 보험회사를 이용, 저축성보험이란 사실상의 수신행위를 해 모은 돈으로 자금이 부족한 사업에 투자를 했고, 이를 통해 몇몇을 세계적 회사로 키워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은행의 고객돈을 이용해 증시 등에 투자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 1933년 글래스-스티걸법을 도입했지만 워런 버핏은 벅셔해서웨이란 보험회사를 이용, 고객의 보험금으로 투자를 해 천문학적인 부를 일궈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 이젠 은행업 자체가 핀테크 등 신기술에 의해 추격당해 사양산업으로 접어들고 있다. 지표를 보면 우리나라 은행들의 총자산이익률(ROA)은 0.48%로 세계 최저 수준이며, 자기자본이익률(ROE)도 6%를 겨우 달성해 이런 수준이면 누가 투자할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요약하면, 은산분리는 너무 오래된 규정으로 실효성도 없었고, 그나마 지금은 산업자본이 투자할 유인조차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나라의 많은 규정이 그렇듯 이 규정은 어려운 감시·감독보다는 매우 손쉬운 원천봉쇄란 방법을 택하고 있는 ‘나쁜 규정’의 표본이란 점이다. 은산분리의 목적이 무엇일까. 바로 대주주인 산업자본에 특혜성 대출을 해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미국은 1956년 은산분리 규정인 은행지주회사법(BHCA) 도입 이후에도 산업자본의 은행 진출을 사실상 허용하는 산업대부회사(ILC)란 제도를 주(州)별로 운영하고 있다. 대신에 미국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규정 215조에 의거, 대주주를 포함한 일체의 내부자에게 특혜성 대출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내부자 남용(insider abuse)’이라 해서 엄벌에 처하고 있다.

미국은 금융 범죄의 경우 살인죄에 준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림으로써 범죄자가 범죄 수익을 향유할 기간 자체를 빼앗아 버린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감시·감독보다는 손쉬운 은산분리 같은 원천봉쇄 규제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케케묵은 은산분리 규정을 대폭 완화하고 그 역기능을 철두철미하게 감시·감독하는 게 시대에 맞는 방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