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호 문화부장
[장규호의 데스크 시각] 성평등이 分權의 시작

우스꽝스러운 공익광고 하나가 1978년 스웨덴 사람들의 눈을 붙잡았다. 울퉁불퉁한 근육의 털북숭이 아저씨가 돌이 지났을까 말까 한 어린아이와 뒹굴며 놀아주고, 기저귀를 갈고, 요리와 청소하는 영상이었다. 주인공은 스웨덴 올림픽 역도 메달리스트 레나르트 달그렌. 아이를 품에 안고 활짝 웃는 모습의 포스터에는 스웨덴어로 ‘BARNLEDIG PAPPA!’란 제목이 붙었다. 육아휴직 중인 아빠라는 뜻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던 남성 중심 사회 스웨덴에 이 광고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육아 가사분담 등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남자다운 남자’가 아니라는 스웨덴식 사고방식이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유모차를 끄는 스웨덴 아빠들을 일컫는 ‘라테 파파’는 그래서 나온 말이다.

'남성 육아' 당연시하는 스웨덴

한국 사람들이 고개는 끄덕여도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은 스웨덴식 성평등은 잘 완비된 법과 제도에 뿌리내리고 있다. 스웨덴에선 자녀가 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 부모가 총 480일의 유급 육아휴직을 쓸 수 있다. 그중 90일은 ‘아빠’가 쓰지 않으면 그냥 사라지는 소멸성이다. 남성이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육아휴직 쿼터인 셈이다.

스웨덴 공공기관은 임원의 여성 비율에 목표치를 둔다. 스웨덴 외교부는 재외공관의 남녀 비율을 5 대 5로 맞춘다. 법과 제도 이전에 사회적 합의라는 큰 흐름도 작용했다. 대부분의 스웨덴 정당은 비례대표 명단을 짤 때 남녀 1 대 1 비율을 꼭 지킨다.

요즘 유행하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육아 참여가 필수라는 인식이 스웨덴에선 보편화돼 있다. 이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늘려 경제를 살찌우는 것은 물론, 서구 개인주의에서 부족할 수 있는 사회 결속력을 다지고, 관용(톨레랑스)의 미덕을 전파하는 순기능을 갖는다고 본다. 양성평등 제도와 관행이 사회통합을 위한 장치일 뿐 아니라 전체 사회발전에 큰 도움을 주는 요소라는 컨센서스가 형성돼 있다. 남성의 이해와 양보, 수긍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제도에 앞서야 할 사회적 합의

스웨덴의 성평등 문화는 요즘 개헌 이슈로 시끄러운 한국 사회에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가 있다며 개헌을 통한 정치체제의 분권(分權)만 얘기하는 게 요즘 우리 사회다. 법을 뜯어고치면 사회 시스템과 문화가 분권형으로 곧 바뀔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판이다. 법과 제도의 개선은 분권형 사회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책임총리제가 헌법에 보장돼 있지만 실제 정치에선 대통령이 총리의 힘을 빼버리지 않는가. 이미 있는 법·제도를 묵혀 두는 것은 한국인의 역사와 관념 속에 ‘권력의 분산’과 ‘분권형 사회’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분권은 물론이고 협치, 합치, 연합, 연립 같은 말도 우리 역사에는 별로 등장한 적이 없다.

분권은 가정 또는 직장 같은 단위로 돌아오면 결국 성평등과 연결된다. 여성에게 동등하게 일할 기회를 주고 육아를 포함한 여성의 부담을 일부라도 덜어주려는 남성 측 배려가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제도와 법만이 아니라 앞선 시민의식과 사회적 합의, 권력을 쥔 측의 양보와 타협이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분권형 사회는 법·제도 개선과 삶·직장문화·인간관계 등 투트랙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진정한 워라밸이 잘 뿌리내릴 토양을 만들 수 있다.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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