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목월과 지훈
‘경주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느란 옥적(玉笛)을 마음속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 1942년 봄, 시인 박목월이 조지훈에게 보낸 답장이다. 둘은 같은 문예지 《문장》으로 등단했지만 얼굴을 몰랐다. ‘언제 한번 보자’는 지훈의 편지를 받고 목월이 경주로 초대했다.

목월은 한지에 자기 이름을 써서 들고 경주 건천역에서 지훈을 기다렸다. 당시 목월은 스물일곱, 지훈은 스물두 살이었다. 둘은 경주 시내 여관방에서 밤새워 문학과 삶을 얘기했다. 낮에는 불국사와 석굴암, 왕릉 숲길을 거닐었다.

그렇게 열흘 이상 어울린 뒤, 지훈은 경북 영양의 고향집에 들러 목월에게 고맙다는 편지를 보냈다. 문우(文友)를 위해 정성껏 쓴 시 한 편도 동봉했다. ‘목월에게’라는 부제를 단 ‘완화삼’이었다.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주옥같은 시였다. 운율이 살아 움직여 편지 속으로 강물이 흘러 넘치는 듯했다. 감격한 목월은 곧바로 화답시를 썼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지훈’이라는 부제를 단 시 ‘나그네’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한창 물오른 두 ‘나그네’가 주거니 받거니 대구를 맞춘 시행(詩行)이 기막힐 정도다. ‘구름 흘러가는’을 ‘구름에 달 가듯이’로, ‘물길은 칠백 리’를 ‘남도 삼백 리’로,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을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로 받아냈으니 절묘하다.

둘의 만남은 광복 후 박두진과 함께 엮은 3인 시집 《청록집(靑鹿集)》으로 다시 한 번 빛났다. ‘완화삼’과 ‘나그네’가 나란히 실린 이 시집 제목은 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딴 것이다. 이를 계기로 ‘청록파(靑鹿派)’가 등장했다.

오늘은 목월의 40주기, 두 달 뒤면 지훈의 50주기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그 봄날처럼 어느새 ‘노오란 산수유 꽃’이 온 산을 물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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