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지방분권 개헌의 허상에서 깨어나야
경제·사회발전을 좌우하는 근본 요인은 정치제도에 있다. 국가흥망사를 보면 경제성장과 소득분배는 물론 사람의 관계도 국가를 규율하는 법과 구성원의 상호작용을 규율하는 관행에 따라 달랐다. 민주화는 국가발전에 기여하지만, 민주화 이후 단계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는 나라마다 달랐다. 국민의 신뢰, 규범, 네트워크, 협력 등이 핵심 변수로 작용했다.

민주주의는 시민사회를 활성화시키지만, 시민사회가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편이 나뉘고 수직적으로 움직이면 신뢰가 저하돼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하곤 했다. 한국은 신뢰가 부족한 데다 지연과 학연에 의한 지역주의가 정치·사회불안을 키워 경제성장에 장애가 됐다. 또 정부의 과도한 개입과 시민단체의 정치화는 부패를 야기하고 신뢰를 떨어뜨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는 최근 연방제에 버금가는 지방분권을 내세우며 개헌을 압박하고 있다. 재정분권으로 야당 지방자치단체장도 혹하게 만들며 지방선거와 개헌의 동시투표를 밀어붙이고 있다. 지방분권 개헌 1000만인 서명 운동은 선거법 위반 논란을 일으켜 지방분권 개헌이 지방선거 전략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정부 주도 개헌은 국회의 3분의 2 동의가 없으면 성공하지 못하지만 지방분권 강화 논리는 남아 정치제도의 실패와 경제·사회발전의 후퇴를 야기할 수 있다.

지방분권의 논리는 많지만 뒷받침할 증거는 부족하다. 지방자치를 민주주의 기초라고 하지만 공산국가나 독재국가도 지방자치를 한다. 지방자치의 역사가 깊은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는 재정분권과 경제성장이 음(-)의 상관관계를 보이고 세금과 재정정책의 분권이 지역 불균형 등 국가지배구조의 질을 떨어뜨린 것으로 나온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정치제도의 성패는 ‘책무성의 확보’에 달려 있다. 지방분권이 책무성을 높이는 정치제도로 뒷받침되지 못하면 정책 남발과 재정 낭비만 커진다. 지방자치제가 부활한 이후 역대 정권은 지역균형개발 논리로 지방분권을 확대했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의 성과는 초라하다. 지방분권의 성과를 보여주는 중요 지표로 경제사회혁신을 들 수 있다. 산업연구원의 광역자치단체별 지역혁신지수는 전국 평균이 2003년 0.44에서 2015년 0.43으로 소폭 감소했다. 그러나 재정자립도가 높은 서울은 0.63에서 0.50으로, 민주화의 성지로 자임하는 광주는 0.32에서 0.25로 대폭 후퇴했다. 광역자치단체 순위도 변화가 별로 없다. 특별자치단체인 제주는 중국 관광객 덕분에 경제가 반짝 좋았지만 혁신능력은 그렇지 못했다.

교육자치제는 더 심각하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 덕분에 재정분권 기반이 일반 자치제보다 튼튼하지만 교육의 성과는 저하됐다. 이는 교육감 직선제 이후 뚜렷한데, 교육감은 교육부와 맞서고 광역지자체와 협력을 기피하는 독불장군이 됐다. 한국은 교육 투자가 OECD에서 최상위권이지만 학업 수준은 하락해왔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한국은 2000년대 초반 1위에서 2015년에는 5위 정도로 밀렸고, 최상위권 비율은 감소한 반면 기초학력에 미달하는 최하위권 비율은 증가해 학력의 총체적 저하가 나타났다. 교육 예산의 60% 이상을 교사 인건비에 지출하고 학생 수업에 들어가는 돈은 적으며 교육의 질을 좌우하는 교사 능력은 떨어진다. OECD의 교사 능력 국가 비교를 보면 한국은 27개국 중 중하위권이다.

잘못된 정치제도는 국력을 소진하고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다. 지방분권이 지방선거로 전락했다는 한탄이 나온 지 오래다. 자치단체장 선거는 중앙집권적 정당이 후보를 결정하고 출신 지역과 학교가 선거판을 좌우했다. 이에 더해 교육감 선거는 정보가 유권자에게 철저하게 가려져 옥석을 구분하기도 어려운 깜깜이 선거가 됐다. 선출한 다음 단체장을 견제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장치가 사실상 부재하다 보니 제왕적 단체장이 돼 지역을 분열시키고 예산을 낭비한다.

개헌을 한다면 지역주의 극복에 주력해야 한다. 지방분권 자체를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불합리한 지방재정구조는 개선해야 하지만 개헌을 통해 재정분권을 달성하겠다는 발상은 할거주의만 키운다. 지방분권 개헌의 허상에서 깨어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