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시·소설 자판기
작가 스탕달의 고향인 프랑스 동남부 도시 그르노블. 이곳 시청과 도서관, 관광안내소 등에는 ‘단편소설 자판기’가 설치돼 있다. 1분, 3분, 5분짜리 버튼을 누르면 그 시간에 읽을 분량의 짧은 작품이 인쇄돼 나온다. 시민들은 스마트폰 대신 글을 읽으며 대기시간을 보낸다.

이 자판기는 그르노블시가 출판사와 손잡고 2015년 처음 선보였다. 사탕뽑기 기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작품은 작가들이 매주 웹사이트에 올리는 수천 꼭지 중 투표로 뽑아 등록한다.

지금은 프랑스 100여 곳으로 확산됐다. 영국에서도 런던 지하철역 등으로 퍼지고 있다. 동전을 넣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료다. 한국에는 지난해 6월 서울국제도서전 때 첫선을 보여 화제를 모았다. 11월 열린 서울숲 청년 소셜벤처기업 엑스포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올 들어서는 경기 용인시가 시청 로비와 전철역 등 5곳에 ‘문학자판기’를 설치했다. 높이 1m 기계의 윗부분 버튼을 누르면 폭 8㎝의 종이에 글이 프린트돼 나온다. 버튼은 짧은 글, 긴 글 두 개다. 분량은 500자, 2000자 안팎이다.

등록작품은 시인 윤동주와 톨스토이 등 국내외 문인의 시 200편, 소설 500편, 수필 300편, 명언 200여 구다.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2주일 만에 이용자가 1만6000여 명에 이르자 용인시는 버스정류장 등에 다섯 대를 더 놓기로 했다.

이달 초에는 광명시가 광명동굴 등 5곳에 자판기를 들여놨다. 경북 울진, 전북 익산에도 곧 등장할 예정이다. 출판도시 파주는 경의중앙선 전철의 ‘독서바람열차’에 문학자판기 한 대를 놨다. 강원 강릉에도 평창 동계올림픽에 맞춰 자판기가 등장했다.

문학자판기 제작사는 청년 창업가 전희재 씨가 설립한 ‘구일도시’다. 감열지에 글자가 인쇄되는 온도 91℃를 뜻하는 이름이다. 이 회사는 1200여 건의 문학콘텐츠를 확보하고 매월 새 작품을 추가하고 있다. 인쇄용지는 친환경 종이를 쓴다. 자판기 한 대 비용은 400만원 정도다.

자판기 앞에 선 사람들은 “어떤 글귀가 나올지 설레면서 기다리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한다. “소설 일부 내용만 나오니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을 사 보거나 집 근처 도서관을 찾는다”는 이도 많다. 아직은 작품을 고를 수 없지만 기술 발전에 따라 원하는 작품을 선택할 시기도 머지않았다.

국민 10명 중 4명이 1년에 한 권도 책을 안 읽는 팍팍한 시대에 문학자판기는 우리 영혼의 보물 창고를 채워주는 양식이기도 하다. 스탕달은 “산속에서 보물을 찾기 전에 자기 두 팔 안에 있는 보물을 먼저 활용하자”고 했다. 자투리 시간이나마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보자.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