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예술 작품을 예술가로부터 보호하기
추문에 휩싸인 고은의 시들이 교과서에서 삭제된다는 얘기를 듣고, 그의 ‘천은사운(泉隱寺韻)’을 낭송해봤다. ‘그이들끼리/살데.// 골짜구니 아래도 그 위에도/ 그들의 얼얼이 떠서/ 바람으로 들리데.//’

오래전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이 그다지 줄지 않았다. 고은이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할 때 서정주가 추천한 작품이니, 아마도 그의 마음이 덜 위선적이던 시절에 쓰여서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미투(#MeToo) 운동’이 드디어 폭풍이 됐다. 이런 종류의 성폭력은 폐쇄적이고 위계가 확고한 조직에서 주로 나온다. 그래서 군대와 종교계에서 가장 심각하다. 추문이 처음 터진 검찰도 그런 조직이다. 미투 운동이 할리우드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가리키듯, 비교적 자유로운 예술계에서도 권력을 쥔 사람은 흔히 성폭력을 자행한다. 이제는 정치계가 소란하다.

좌파에서 추문이 많이 터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체주의에 상대적으로 친화적이므로, 좌파는 아무래도 도덕적 성찰이 부족하다. 지도자가 제시한 목표를 추구하면서 과정의 정당성을 묻지 않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도덕적 타락을 부른다.

이번 사태로 조직 안에서의 성폭력은 상당히 사라질 것이다. 자신이 겪을 위험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문제를 지적한 사람들에게 모두 고마워해야 한다. 이 문제를 처리하는 길은 간결하다. 약한 사람에게 성폭력을 휘두른 사람들이 벌을 받으면 된다. 그러나 예술계의 추문들은 그런 처리로 끝나지 않는다. 비난받은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들에 대한 평가라는 형이상학적 문제가 남는다.

과학 이론의 정당성은 그것의 기원과 관련이 없다. 어떤 이론을 주창한 사람의 학문적 권위나 도덕적 평판이 그것의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방법론적으로 타당한 검증을 통해서 진위가 판명된다.

예술은 다르다. 작품을 낳은 사람의 됨됨이가 그것의 진정성과 가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예술가가 자신의 경험에서 엿본 삶의 진정한 모습을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예술가가 압제적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의 작품은 진정성을 많이 잃는다. 공산주의 러시아의 위세가 한창이던 시절, 예브게니 예브투셴코는 반체제 시인으로 서방에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그가 러시아 비밀경찰(KGB)의 조종을 받는다는 것이 드러나자, 그의 작품은 외면당했다. 체코 출신 프랑스 작가 밀란 쿤데라는 전체주의 체제에서 황량한 삶을 꾸려가는 동유럽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가 젊었을 적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방의 첩자를 경찰에 밀고했다는 혐의를 받자, 그의 작품엔 그늘이 드리웠다.

우리에게 익숙한 경우들은 해외에서 성공한 한국 예술가들이 북한의 앞잡이로 활동한 일이다. 프랑스에서 활약한 이응노 화백과 독일에서 성공한 윤이상 작곡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조국을 배반하고 사악한 적국의 첩자로 암약했다. 게다가 가난한 유학생을 돕는 척하면서 그들을 북한 정권에 넘겨 파멸로 이끌었다. 이들의 죄는 예브투셴코나 쿤데라의 죄와는 차원이 다를 만큼 무겁다. 그들은 진정으로 뉘우치지도 않았다. 당연히 그들의 작품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해외의 평가보다 훨씬 낮다.

미국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사람의 천성에서 두드러진 감정적 특질은 동료 인간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검토하고, 그것에 의지해서 그들의 성격과 신뢰성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꾸며낸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의 인품과 경험이 중요하다. 누구도 거짓말쟁이나 악한(惡漢)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른 편으로는, 우리는 예술 작품을 예술가로부터 떼어놓으려 애써야 한다. 예술 작품은 사회의 문화적 자산이다. 그것을 낳은 예술가의 비열한 인품이나 부도덕한 행적만으로 평가해서 가치 없다고 버리기엔 너무 소중하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그것을 낳은 예술가의 허물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긴 세월에 걸쳐 사람들의 평가를 통해 가치 없는 작품은 잊혀지고 진정한 가치를 지닌 작품은 살아남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