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만남, 공존의 시대를 여는 열쇠
지난달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한 간 대화와 교류가 조금씩 재개되고 있다. 여자 아이스하키와 같은 일부 종목에서는 단일팀을 이루고, 남북 응원단이 함께 응원하고, 북측 고위 관계자가 올림픽 개회식과 폐회식에 참석하면서 대화의 장이 점차 무르익는 분위기다.

때를 같이해 남북의 대화 재개를 반기며 기대하는 이들이 있다. 북녘에 가족과 친척을 두고 온 이산가족이다. 한국과 북한 적십자사 간 합의로 1985년 이산가족 상봉을 처음 시작한 이후 남과 북은 2000년부터 2015년까지 스무 차례 만남을 이어왔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2015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만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이산가족이 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는지, 혹은 살아있는지, 돌아가셨는지 생사만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이산가족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남과 북에는 이산가족이 6만여 명씩 있는데, 그들 가운데 약 70%가 80세 이상이다. 90세 이상도 23%에 달한다. 지난해만 해도 상봉 신청자 가운데 3800명에 가까운 이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이제는 시간이 없다.

남과 북이 정치적·외교적으로 풀어야 할 난제가 많겠지만 이산가족 상봉은 이와는 별개로 진행돼야 한다. 가족을 만나는 일에 정치적 이슈가 걸림돌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독일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룬 정신의 바탕에는 ‘이것이 안 되면 저것도 안 된다’가 아닌, ‘이것도 하면서 저것도 한다(not only but also)’가 있다. 비록 정치 이념은 다르더라도 가족끼리 만나고, 이들이 서로 소식이라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번 동계올림픽이 끝나고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선수들이 헤어지는 곳에서는 눈물이 바다를 이뤘다고 한다. 한 달간의 짧은 만남이었을 뿐인데도 헤어짐이 애틋한 건 다시 만날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북녘에 가족을 두고 온 이산가족들의 그리움은 어떠하겠는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견우와 직녀의 그리움에 까마귀가 다리를 놓아주었듯, 분단선을 앞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이산가족의 그리움에 우리의 작은 관심이 다리가 돼줄 것으로 기대한다. 인도주의와 평화 공동체 건설은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