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따뜻한 명절, 정겨운 우리 술
해마다 이맘때면 설날 아침 풍경 하나가 떠오른다. 온 가족이 정성을 다해 차례를 모신 후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술잔에 담아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차례대로 술을 나눴다. 백출, 대황, 도라지, 방풍 등의 한약재를 청주에 넣고 끓여 알코올은 없애고 순한 맛만 남기는 건강음료에 가까운 술이다. 어린아이 잔부터 채우는 이유는 질병에 약한 아이들 먼저 좋은 것을 마시게 하려는 어른들의 각별한 정이다. “올 한 해도 건강하고 무탈해라”는 덕담 한마디는 또 한 해를 살아갈 기운을 북돋아줄 만큼 따스했다.

우리나라에는 지역마다 오래된 역사와 지역의 색깔을 지닌 전통 술이 있다. 집집이 내려오는 술 빚는 비법도 저마다 달라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필자의 외가에서도 대대로 전해지는 독특한 맛의 가양주(家釀酒)가 있어 간혹 술 익는 향기가 퍼지곤 했다. 정성스럽게 빚은 우리 전통 술은 적당히 마시면 몸에 이로워 약주라고도 한다. 우리 조상은 농경 생활양식의 기준이 되는 절기마다 새로운 재료로 술을 담가 즐겼다. 정월 대보름에는 귀가 밝아진다는 귀밝이술, 단옷날에는 건강을 위해 창포주, 가을이 깊어지는 중앙절에는 국화주를 빚어 마셨다. 이외에도 계절의 흐름에 순응하며 다양한 술을 가양주로 빚어 음미했다.

가양주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전통 술은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전국 8도에 약 360여 종이 전승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자가 양조가 금지되고 급기야 밀주라는 오명을 쓰면서 서서히 명맥을 잃어갔다. 농촌진흥청은 사라진 우리 전통 술의 맥을 잇고 한동안 침체된 전통 술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우리 술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고문헌에 수록된 전통 술의 자취를 더듬어 해마다 2∼3종의 우리 옛 술을 발굴·복원했다. 현재까지 녹파주, 아황주, 벽향주 등 모두 15개 전통 술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만찬주로 선정된 탄산막걸리 ‘오희’도 탄산가스 생성량을 조절할 수 있는 농촌진흥청 기술로 탄생한 작품이다.

술은 사람이 담그는 음식이지만 그 맛은 사람이 홀로 좌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자연의 흐름과 술을 빚는 사람의 기다림 및 정성이 더해져 원래 재료가 갖고 있던 강한 성질이 점차 순해지고 유익함만 남는 숙성에 이른다. 사람도 익을수록 성숙해지는 것은 술과 닮은 듯하다. 설날, 조촐한 우리 술상을 차려 고마운 사람과 묵혀 둔 정담을 나누며 새해를 여는 것도 멋스러운 일이다. 술에는 만남을 더 정겹게 해 주는 묘한 힘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