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한국도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평창 동계올림픽이 막 올랐다. 이로써 4대 스포츠 제전(하계·동계올림픽, 축구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을 모두 개최한 다섯 번째 나라가 됐다. 올해 1인당 소득 3만달러 진입도 유력하다. ‘30-50클럽(소득 3만달러,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일곱 번째 멤버를 예약했다. 경제 규모 세계 11위, 교역 규모 6위(작년)도 자랑거리다. 외견상 선진국 구색은 두루 갖췄다.

국내에서 살아본 외국인은 한국을 이미 선진국으로 여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싸고 편리한 대중교통, 안전한 밤거리, 친절한 은행·마트·주민센터, 감기도 치료해 주는 건강보험, 당일·총알배송, 기술선도 기업…. 대부분 빠른 속도와 대기업, 공공서비스들이다.

한국인도 스스로 선진국이라고 여길까. 대다수가 고개를 저을 듯싶다. 눈높이는 구미에 맞춰져 있는데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아 보이는 탓이다. 그럼 어떤 나라가 선진국일까. 잘살기만 하면 선진국인가. 고소득과 화려한 건물이 많은 중동 산유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하진 않는다.

선진국으로 꼽히는 나라들에선 공통점이 발견된다. 고도화된 경제력 바탕 위에 안정된 정치제도, 특권 불용, 공정한 법 집행, 탄탄한 신뢰자본, 배려, 강력한 공권력, 전문가 우대, 높은 직업윤리와 문화적 소양, 다양성 등을 꼽을 수 있다. 경제력이 필요조건이면 정치·사회·문화적 성숙은 충분조건이다. 결국 사람이 문제다.

이를 한국에 대입해 보자. 수신(修身)도 못하는 정상배들이 판치는 정치는 문제 그 자체다. 이익집단의 기득권 투쟁, 채용 비리에서 보듯 특권과 지대추구도 흔하다. 법 위에 대중정서가 있고, 공권력은 매 맞기 일쑤다. 조그만 권력이라도 쥐면 멋대로 하려 드는 ‘갑질’에 남녀·노소·분야가 따로 없다.

‘우리’ ‘공동체’ 같은 언어습관의 이면에는 ‘내 가족, 내 편’만 챙기는 정실주의(cronyism)가 은폐된 듯하다. 교수가 미성년 자녀를 논문 공저자로 올리는 나라가 또 있을까. 사는 곳과 아파트 평수로 귀천(貴賤)을 가리고 차림새로 타인을 규정하니 유행 쏠림이 유독 강하다.

성숙하지 못한 직업윤리는 불신의 원천이 된다. 한국인들의 일본 관광 붐 요인 중 하나가 음식점 차이다. 일본에선 가격대별로 기대치와 수준이 일치하는데, 한국에선 어긋날 때가 많다. 중국 특급호텔에서 변기 닦는 수세미로 컵 씻는 것을 비웃었는데, 그게 남의 일이 아니었다.

정치인들은 모든 원인을 제도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드러난 현상뿐 아니라 제도 역시 우리 자화상일 뿐이다. 경제는 압축성장이 가능했지만 관습, 의식, 지력 등 사회화를 통해 습득되는 구성원의 ‘아비투스(habitus)’는 압축발전이 안 된다. 그토록 안전불감증을 한탄해도 사고·화재가 되풀이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먹고살 만해진 한국인에게 무엇이 부족한 걸까. 자유·권리를 누리는 만큼 책임과 의무에 대한 숙고가 일천함을 부인하기 어렵다. 서구 선진국들도 근대 400~500년간 지금 우리와 같은 갈등과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내 자유’만큼 ‘남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고 불신보다 신뢰가, 배척보다 배려가 상호이익이란 사실을 경험으로 체화한 것이지, 그들이 특출나서가 아니다.

책을 통한 간접경험이라도 해야 할 텐데, 지난해 한국인의 독서율은 59.9%로 추락했다. 1년간 단 한 권이라도 읽은 성인 비율이다. 북유럽을 부러워하기 전에 80~90%에 달하는 그들의 독서율부터 본받아야 하지 않겠나. 책과 담 쌓은 선진국은 없다.

최근 남북단일팀 구성을 놓고 2030세대의 분노가 분출된 것처럼, 집단·국가보다 개인이 부각된 것은 주목할 현상이다. 집단주의 사고에 익숙한 이전 세대와는 다른 모습에서 한 가닥 희망이 보인다. 하지만 ‘개인의 탄생’까지는 멀었다. 각자 자기 역할을 다하고, 집단에 의한 억압과 오도(誤導)를 거부하는 게 진정한 자각이다. 그런 개인의 성찰이 축적될 때 어느덧 선진국이 돼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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