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소리 없이 한국을 빠져 나가는 기업
“82만9000평방피트 면적에 2억5000만달러를 투자하는 LG전자 공장은 600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삼성전자는 3억8000만달러를 투자해 향후 3년간 950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최근 한국 전자회사들의 미국 세탁기 공장 건설 현황을 전하는 미국 언론들의 기사다. 두 회사 모두 준공을 앞당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로 관세 폭탄을 맞게 됐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한국 신문기사에는 없는 숫자가 하나 있다. 일자리다. 해당 기업이 한국에서는 공개하지 않은 숫자다. 의도적이다. 담당자들은 “어쩔 수 없이 나가야만 하는 사정을 알지 않느냐”고 설명했다.

해외로 나가는 것은 대기업만의 얘기가 아니다. 중견 철강업체 넥스틸도 미국으로 생산시설을 옮긴다. 트럼프 정부가 1년 만에 관세율을 8%에서 46%로 올리면서 지난해 9월부터 대미(對美) 수출이 중단됐다. 결국 1년에 100억원을 버는 회사(2016년 기준)가 300억원을 들여 미국 휴스턴에 공장을 짓기로 했다.

가전, 자동차, 철강에 이어 석유화학업체들도 미국으로 나갈 태세다. 휴비스는 태국 기업과 합작해 미국에 법인을 설립한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상반기 안에 현지 공장 투자 규모를 확정할 계획이다. 대림산업도 미국에 석유화학단지 개발을 추진하기로 했다. 경기가 살아나면서 시장 수요가 커지고 있는 미국에 먼저 자리를 잡기 위해서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상황이 생각보다 매우 심각하게 돌아간다”며 “이러다간 섬유업체까지 나갈 판”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빠져나가는 일자리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정부는 ‘생기는’ 일자리는 챙기지만 ‘나가는’ 일자리는 집계하지 않는다. 기업들이 공장을 미국으로 옮기는 이유가 트럼프 때문만일까. 기업인들은 “돈이 전부는 아니다”고 말한다. 정부가 법인세 최고세율을 25%로 올렸지만 세금을 더 내는 것은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대신 의욕을 꺾지 말라고 주문한다.

단적인 예가 “일단 모이세요”다.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기업에서 정부를 상대하는 대관(對官) 담당자들이 부쩍 자주 듣는 소리라고 한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혹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가 아니다. 대통령의 현장 방문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하루 전날 불쑥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부른다. 신년 간담회에 30분 넘게 지각해서 “최저임금 인상 방침에 잘 따라달라”는 일방적인 훈시만 하고 자리를 뜨는 장관들의 행태에 기업인들은 마음을 접는다.

많은 기업인 사이에서 이 정부의 별칭은 ‘알아서’다. 국가적 대사에는 ‘알아서’ 협조하고, 최저임금 인상 여파는 ‘알아서’ 흡수하고,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획일적 지침도 ‘알아서’ 맞추고, 미국 등의 보호무역주의도 ‘알아서’ 피해가라는 비아냥이다.

기업들은 상품을 만들어 경쟁한다. 고객이 외면하면 망한다. 정책의 고객은 국민과 기업이다. 기업도 정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여지도 없이 정책을 강요해 놓고 ‘알아서 맞추라’고 하면 기업들은 외면할 수밖에 없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일자리 감소로 나타난다.

이심기 < 산업부 차장 sglee@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