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모건스탠리의 기적
2001년 ‘9·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붕괴되면서 약 3000명이 사망했다. 세계적인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쌍둥이 빌딩 중 나중에 무너진 ‘타워2’ 73층에 입주해 있었다. 화재로 전기가 나가자 사무실이 아수라장이 됐지만 2700여 직원 중 희생자는 13명에 불과했다. 8년 넘게 해 온 연 4회 재난 대비 훈련 덕분이었다.

여기엔 이 회사 안전 책임자 릭 레스콜라의 역할이 컸다. 그는 일부 경영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난 대비 훈련을 이어갔다. 직원들은 자연스레 대피 통로와 대피 요령을 숙지했고, 불과 10여 분 차이로 붕괴된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재난 대비 훈련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모건스탠리의 기적’이다. 미국은 ‘9·11 테러’를 계기로 재난안전시스템을 완전히 뜯어고쳤다. 미국 산업안전보건청(OSHA)은 2001년 말 모든 기업과 기관에 표준 대피 매뉴얼을 배포했다. 모건스탠리 수준의 대피 훈련 프로그램 수립과 정기적인 훈련도 권고했다.

허리케인 등 재난 발생 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미국의 모습은 ‘9·11 테러’ 이후 높아진 안전의식과 반복된 훈련, 예방 및 사후 조치를 세세하게 담은 ‘매뉴얼의 힘’에 적지 않게 기인한다. 연방정부, 주정부, 기초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기업은 매뉴얼에 따라 각기 재난 대응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지진이 빈번한 일본은 미국 못지않은 ‘매뉴얼의 나라’다. 대표적인 재난 대비 매뉴얼이 ‘도쿄방재(東京防災)’다. 일본 도쿄도(東京都)가 2015년, 전 가구에 배포한 323페이지 분량의 책자다. 도쿄도는 홈페이지에도 4개 언어(일본어·한국어·영어·중국어)로 책자를 올려놨다.

도쿄방재는 지진은 물론 테러, 집중 호우, 전염병 등 크고 작은 일상의 위기와 위험 상황에 대처하는 요령을 자세히 수록했다. 재난 징조, 몸 보호하기, 주의가 필요한 장소, 해야 할 행동,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재난 종류별로 세분화했다. 초등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과 만화를 많이 활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시민의 낮은 안전의식은 차치하더라도 국민이 공유하는 매뉴얼이 거의 없다. 행정안전부 국민재난안전포털에 간략하게 소개된 ‘국민행동요령’이 그나마 조금 알려진 수준이다. 오죽했으면 국내 네티즌 사이에서 2017년 11월 경북 포항 지진 때 도쿄방재가 인기를 끌었을까.

세월호 참사 이후도 영흥도 낚싯배 전복, 충북 제천 화재,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 등 후진국형 인재(人災)가 끊이지 않고 있다. 사업주가 안전 규정을 지키지 않은 탓이긴 하지만 피해자들이 재난 대비 매뉴얼만 숙지했더라도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체계화된 매뉴얼과 반복 훈련 없이는 ‘모건스탠리의 기적’도 그저 남의 나라 일이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