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행사하는 투자기업에 대한 의결권 가운데 민감한 사안의 의사 결정은 앞으로 민간 위원들로 구성된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이하 의결권전문위)에 맡겨질 것(한경 1월26일자 A1, 24면 참조)이라고 한다. 보건복지부가 다음달 초 “의결권전문위가 요구하면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의결권 행사 결정을 넘겨야 한다”는 내용의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지침 개정안’을 심의 의결할 예정이어서다.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의 독립성을 높인다는 명분이지만, 인수합병과 이사·감사 선임 등 기업의 핵심 경영 안건들이 외부 비전문가 결정에 휘둘릴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의결권전문위가 국민연금 투자기업 의결권 행사와 관련한 책임회피 수단으로 악용될 것이라는 비판도 많다. 주로 학자들로 구성된 의결권전문위 위원들은 국민연금 투자기업의 핵심 경영 안건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게 되지만, 결정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나더라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국민연금 역시 규정에 따라 의사 결정을 위임한 만큼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면 그만이다.

기업 의사 결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려는 정치·사회적 요구가 계속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책임지지 않는 권한 확대는 곤란하다. 지난해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 재개 여부를 놓고 공론화위원회가 설치됐을 때도 권한과 책임 논란이 일었다. 공론화위원회가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 결정에 대한 책임회피 수단일 뿐으로,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규정한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았다.

기금 규모가 600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 보유한 상장사가 270곳 이상이다. 정부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국민연금이 기업 의사결정에 툭하면 간섭하는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과 네덜란드연금은 의결권과 주주권 행사를 내부 투자부서에서 결정하고, 일본 공적연금(GPIF)은 기금 운용을 담당하는 외부의 민간 운용사에 위임하고 있다. 자산운용을 책임지는 곳에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중요한 결정일수록 책임 소재가 분명해야 하고, 권한이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