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헨리 조지가 만드는 강남 투기대책
미국 정치경제학자 헨리 조지(1839~1897)는 경제학 관점에서 사람을 노동자, 거지, 강도 세 부류로 분류했다. 노동만이 정당한 대가를 낳고, 그 외는 노동의 대가를 강탈하거나 빌어먹는다는 것이다. 부(富)를 창조하는 모든 생산활동은 반드시 자연이라는 공간적 무대(토지)와 결부된다. 인간 존엄성과 권리도 자연이 제공하는 기회의 평등한 이용이 보장되지 않으면 유명무실해지고 만다. (이정우 외, 《헨리 조지:100년 만에 다시 보다》)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서부로 간 조지는 철도 주변 땅값이 뛰고, 토지 소유 여부에 따른 격차를 목도한 뒤 ‘토지 보유는 곧 불로소득’이라고 결론지었다. ‘풍요 속의 빈곤’은 땅부자들이 성장 과실을 가로챈 탓이라며, 땅값 상승분을 전액 세금으로 환수하는 토지단일세를 주장했다.

당시에는 센세이션이었다. 그의 저서 《진보와 빈곤》은 200만 권 넘게 팔렸고, 장례식에 10여만 명이 운집했을 정도다. 톨스토이도 조지에게 꽂혀 땅을 소작인에게 나눠줬다. 지금은 철 지난 경제 가설로 평가되지만,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조지스트(Georgist)’가 적지 않다.

헨리 조지가 21세기 한국에서 되살아났다. ‘투기와의 전쟁’ 기저에는 조지의 토지공개념이 깔려 있다. 정부는 초과이익 환수, 보유세 인상 등을 밀어붙일 태세다. 여당 대표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땅이 먹는다”는 희화적인 타이틀로 헨리 조지와 지대개혁 토론회까지 열었다.

타깃은 물론 서울 강남이다. 정부 목표는 집으로 돈 버는 구조를 깨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지의 가설이 실현된 적 없듯이, 의도대로 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 이유는 본인들이 행동으로 보여준다. 장관·수석 중에 강남 집을 팔았다는 얘기는 전혀 안 들린다. MB정부를 ‘강부자(강남 땅부자) 정권’이라고 비난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강부좌(강남 부자 좌파)’인 셈이다.

강남 집값은 어쩌면 우리 사회를 이끄는 좌우 엘리트들의 ‘묵시적 담합’의 결과일 수도 있다. 어떤 정부건 지난 40여 년간 개발자원을 강남에 집중해왔다. 일례로 지하철 7호선 청담역은 환승역도 아닌데 출구수가 14개다. 도심 시청역(12개)보다도 많다. 수서발 SRT도 들어갔다. 강남에 살아본 사람들은 다 안다. 자산가치 이전에 학군, 학원, 일자리, 병원, 문화시설, 도로, 대중교통 등 생활의 효용이 가장 높지 않은가.

정부 의지가 단호해도 ‘강남 필패’를 점치는 전문가는 없다. 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들어올 사람은 줄을 서 있다. 오히려 뉴욕 맨해튼, 런던 시티의 집값이 20년간 내내 오른 데 비해 강남은 새발의 피라는 주장도 있다. 정부가 시장을 제어하겠다는 시도는 ‘치명적 자만’에 가깝다. 다주택자 규제는 ‘똘똘한 한 채’ 선호를 더욱 키웠고, 외국어고·자사고 무력화는 강남 학군수요까지 부활시켰다.

시장의 복잡다단한 작동원리에 대해서는 애덤 스미스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얼버무렸다. 정부가 시장과 싸우겠다고 달려들수록 시행착오가 커질 수밖에 없다. 부동산에 관한 한 정부는 해결사가 아닌, 문제 그 자체일 때가 많았다.

선호와 선망의 대상인 강남은 세금과 규제로 때릴수록 희소가치가 더 높아진다. 해법은 희소성을 낮추는 데 있다. 그러려면 발상을 획기적으로 전환해 강남에 초고층을 허용하고, 용적률을 더 높여주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강남에 버금가는 대체재 공급도 늘려야 한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헨리 조지는 틀렸다. 한정된 토지(폐쇄계)라는 고정관념에 갇히면 도시의 수직확장, 공간효율 극대화 등 ‘개방계’를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 삼성전자 아마존 알리바바 등이 토지로 부를 차지하는가. 이윤기회를 포착하는 기업가적 발견이 있을 때 부동산도 가치가 생긴다. 지금 정부에 절실한 것은 시장 작동원리와 공간활용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부터 교정하는 것이다. 그래야 해법이 보인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