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창 화해'에 취해있을 수만은 없다
무술년의 남북관계는 파격으로 시작됐다. 신년사를 통한 북한의 평화공세에 이어 남북 고위급 회담이 성사되고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대규모 공연단 방남(訪南) 등이 차례대로 결정되면서 남과 북의 관련자들이 상대편 시설을 방문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개운치 않게 느끼는 국민도 적지 않다. 이는 “청와대 초토화”를 외치며 핵 실험을 거듭해왔고, 평창 이후에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은 북한에 그렇게까지 무임승차를 허용할 필요가 있느냐는 불만 때문일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모처럼 마련된 남북 한마당의 체육행사를 보면서도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는 국민의 심기를 충분히 보살피고 북한에 대해서는 ‘부족하지도 지나치지도 않는’ 대접으로 국민적 화합을 끌어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더욱 중요한 것은 평창 올림픽 이후에 도래할 수 있는 사태들도 내다보면서 대비해 나가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말해 평창 올림픽 이후 무술년의 한반도 정세에 대해 크게는 세 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할 수 있다. 첫째는 북한이 평창을 계기로 ‘개과천선(改過遷善)’해 비핵화 심중을 밝힘으로써 국제사회의 대북관이 개선되고 남북관계가 급진전되는 시나리오다. 둘째는 미국과 북한 간 또는 국제사회와 북한 간 핵 대화가 재개되지만 북한이 ‘대화 따로, 핵개발 따로’라는 종전의 이중전략을 재탕함으로써 대결국면으로 복귀하는 시나리오다. 셋째는 북한의 추가적 핵 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로 인해 미국의 군사행동이 가시화되면서 또다시 전쟁 위기가 고조되는 것이다. 첫째 시나리오는 모든 한국 국민과 국제사회의 희망사항이지만 가능성이 희박하고, 그보다는 두 번째 시나리오의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당연히 세 번째 시나리오 역시 배제할 수 없다.

날로 강화되는 국제 제재로 인해 한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을 북한의 경제와 그럼에도 여전히 꺾일 줄 모르는 평양 정권의 핵 보유 의지를 종합할 때 북한이 핵 보유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한·미 동맹을 이완시키는 방안을 추구할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핵 동결 아래 미·북 관계 개선’이나 ‘쌍중단(북한 핵 실험 및 미사일 발사 유예와 한·미 연합훈련 중단)’ 등 하이브리드 시나리오는 한국의 안보를 해치는 내용이지만, 미국이 끝까지 반대할 것이란 보장은 없다. 미국이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수용하거나 한국 입장을 충분히 배려하지 않은 채 대북 군사행동을 취하는 것은 ‘코리아 패싱’의 양 극단에 해당하는 사례로 한국에는 달갑지 않은 시나리오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미국이 한·미 동맹의 전략적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또는 얼마만큼 ‘북핵 피로증’을 느끼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최대 피해 당사국이면서도 평창 이후의 시나리오를 결정하는 주변적·종속적 변수에 머물고 있으며, 이는 한국의 업보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정부들은 주변국이 원하지 않지만 한국에는 지렛대가 될 수 있는 선택을 후임들에게 미루는 ‘폭탄 돌리기’를 반복해왔고 그런 식으로 임기 동안 평안을 추구해왔다.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수소탄까지 만든 상황이라면 한국도 조건부 폐기라도 선언했어야 했지만 그런 정부는 없었다. 북한이 정녕 핵을 고수한다면 한국도 대응적 핵 무장에 나설 수 있음을 경고하기 위해 핵 잠재력 배양을 검토라도 해야 마땅했지만 그런 정부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은 미국과 중국의 심기를 살피면서 북한의 눈치를 보는 ‘한 마리 순한 양’으로 살아온 것이다.

지금 국민은 북한 당국자들이 “재를 뿌리지 않는 것에 감사하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며, 우려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평창올림픽을 바라보고 있다. 한국이 한·미 연합훈련을 연기시키고 동맹국 잠수함의 기항을 거부하면서까지 북한을 배려하는데도 북한은 올림픽 전야제 날에 평양에서 열병식을 하겠다고 하니 하는 말이다. 동시에 정부에 대해서는 가능성의 높고 낮음을 떠나 모든 시나리오에 대비해 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평창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되 올림픽 이후에 도래할 수 있는 사태에 대해서도 차분하게 대비해 달라는 것이 국민 바람이다.

김태우 < 건양대 교수, 전 통일연구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