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리가 잊고 있는 통일
4차 산업혁명이 눈부신 속도로 문명의 틀을 바꾸고 있다. 개인, 기업, 국가 모두 이 혁명적 변화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앞서가는 나라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싸고는 이와 너무 동떨어진 현상들이 현실을 압도하고 있다. 북은 핵과 미사일로 미국을 밀어내고 한반도를 석권하려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거꾸로 자신들의 체제가 소멸한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내부 갈등으로 숨이 막힌다. 현 정권이 밀어붙이는 적폐청산 아젠다는 아무리 좋게 봐도 과거지향이지 미래지향은 아니다. 미국과 중국을 축으로 하는 신(新)냉전기류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가열되고 있다. 냉전과 패권은 이미 다 철 지난 과거 유산이다. 왜 국제정치의 이 부정적 에너지가 하필 한반도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을까. 한반도 분단은 국제적 냉전의 산물인데, 그 냉전이 해체된 지 30년이 지나도록 오직 한반도만 분단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2018년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반도 정세가 본질적 변화를 맞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가파른 선택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선택은 북의 도전에 굴복해 북핵을 동결하는 수준에서 타협하고 미국이 한반도에서 떠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군사적 수단으로 북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비핵화를 관철하는 길이다. 외교, 경제, 군사적 압박을 통해 북을 굴복시키거나 북 내부에서 체제붕괴를 유도하는 현재의 전략은 아무리 길어도 올 상반기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위 두 시나리오 중 어떤 시나리오가 현실화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어느 것도 우리에게 시련과 희생을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북핵이 용인되면 우리 내부갈등은 격화되고 공포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자체 핵무장의 앞길은 험난할 것이다. 군사적 수단이 동원된다면 북 체제가 붕괴되는 것은 정해진 일이다. 대한민국이 이 긴장과 공포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비핵화 이후 한반도의 질서를 통일로 몰고 갈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통일의 시대가 열린다면 그 희생을 보상하고도 남을 축복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이 엄중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통일을 잊고 있다.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대한민국 헌법에 의한 통일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얼마 전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한 언론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은밀한 협의내용을 흘린 일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미국이 군사개입을 하더라도 한반도 통일을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중국에 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전율을 느꼈다. 1989년 동독이 붕괴됐을 때 통일로 대세를 몰고 간 주역은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와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었다.

통일을 성취한 독일은 모든 우려를 불식하고 유럽통합을 이끌며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나라가 됐다. 이를 뻔히 보면서도 우리는 통일을 잊고 있다. 이것이 될 말인가. 중국 일본 러시아 모두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선호한다. 우리가 강인한 통일의지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한반도 정세가 근본적으로 전환되는 올해 우리는 통일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가능성이 높다. 그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콜 총리가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통일이라는 열차가 왔을 때 타야지 그냥 보내면 언제 다시 오겠느냐며 호소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최근 판문점을 통해 총탄을 맞으며 귀순한 북한 병사가 의식불명에서 깨어나 처음 한 말이 충격적이었다. “남한 음악을 틀어 달라.” 이 병사의 마음속에 이미 와 있는 통일을 왜 우리는 잊고 있는지 불가사의하다. 한반도에 남아있는 냉전의 잔재로 인해 우리 민족이 더 이상 갈등해서는 안 될 일이다. 2018년은 운명적으로 대격변의 해다. 우리 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통일의지를 깨워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다.

이인제 < 한국유엔봉사단 총재, 전 국회의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