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우리 졸혼했어요
지난해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신조어가 ‘졸혼(卒婚)’이라고 한다. 황혼기 부부가 이혼하지 않고 따로 살면서 자유롭게 각자의 삶을 즐기는 졸혼은 이제 가사 법정에서도 낯설지 않다.

결혼한 지 30년째인 윤모씨(57)는 법정에서 이렇게 하소연했다. “경제적 여유도 생기고 아이도 대학에 갔으니, 이제는 성당도 열심히 다니고 친구들과 모임도 자주 하며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에게 그렇게 얘기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갱년기 우울증이 의심된다며 더욱 간섭하려 들어 이제는 마음이 떠나 같이 살 수 없다. 이혼하게 해달라. 이혼 후 남편 태도에 변화가 있으면 5년 후 재결합할 수도 있다.”

남편은 “지금까지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사업체를 운영하며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이혼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부부 상담 등을 통해 관계 회복을 원한다”며 이혼에 반대했다.

부부 상담 절차를 거친 뒤 판사가 졸혼에 관해 설명하고 조정을 권유했다. 남편은 결혼했는데 따로 사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처음에는 반대했다. 하지만 가사에 얽매여 우울해하는 아내를 보고 결국 졸혼도 결혼과 가정을 지켜내는 한 방법이라 생각한다며 지난해 말 졸혼을 받아들였다.

이제 가정법원에서도 황혼 이혼 사건에서 부부 상담을 거치게 한 뒤 졸혼으로 조정을 권유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졸혼은 형식상으로만 혼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합의, 혼인 관계로부터 파생되는 의무 이행과 관련한 당사자 사이의 불화와 다툼을 평화롭게 종식해 부부 관계를 치유할 가능성을 열어둔다. 또한 이혼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법률상으로는 배우자가 존재하고, 부부로서 부모가 존재한다는 안정감을 가족 구성원에게 부여할 수 있다.

졸혼이 당장 이혼을 피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졸혼을 선택할지, 황혼 이혼을 선택할지는 당사자가 판단할 몫이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결국은 모두가 황혼기에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선택이 아닐까? 졸혼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배우자가 어느 날 갑자기 졸혼을 제의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졸혼이나 황혼 이혼의 위기가 찾아오기 이전에 오늘부터라도 배우자의 사소한 일상 속을 관찰해 볼 일이다. 배우자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고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지 궁금해하고, 배우자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려듣지 않으면서 한 해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성백현 < 서울가정법원장 slfamily@scourt.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