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참회왕'과 '정복왕'
1066년은 영국 역사의 중대 변곡점이다. 이때 앵글로 색슨계의 마지막 왕 에드워드가 죽고, 대륙에서 온 윌리엄 1세가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두 왕조의 운명을 가른 헤이스팅스 전투도 벌어졌다.

에드워드는 에설레드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오랫동안 불운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10세 때 덴마크의 침공으로 나라를 빼앗긴 뒤 어머니 고향인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로 망명을 떠났다. 그곳에서 20여 년의 객지생활을 보낸 뒤 덴마크 지배가 끝난 1042년에야 왕이 됐다.

그는 신앙심이 워낙 깊어 날마다 기도하고 참회했다. 그래서 ‘참회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왕위를 찾게 되면 로마를 순례하겠다’는 망명 시절의 맹세를 지키려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그 비용으로 성당 부속 수도원을 크게 증축했다. 그게 지금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그의 무덤도 여기에 있다.

그에게는 후계자가 없었다. 처남 해럴드가 왕좌를 차지하자 노르망디 공작인 윌리엄이 들고일어났다. 에드워드가 피란 시절 자신에게 왕위 계승을 약속했고, 해럴드는 신하가 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윌리엄은 60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 파죽지세로 진군한 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를 죽이고 영국을 정복했다.

그해 성탄절에 웨스트민스터에서 대관식을 올린 그는 곳곳의 반란을 진압하며 노르망디 영토까지 지배하는 ‘정복왕’이 됐다. 대륙식 봉건제도도 정착시켰다. 그의 정복으로 영국에 프랑스 문화와 관습이 이식됐다. 영어도 라틴어와 프랑스어의 영향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1066년은 이처럼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하기까지의 과정을 50개 장면으로 나눠 표현한 대형 자수(刺繡) 그림이 노르망디의 바이외 성당에 보존돼 있다. 길이 70m의 유네스코 기록유산인 이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영국인에게 더 없이 귀중한 역사의 상징물이다.

어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영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 유물을 “대여하겠다”고 밝히자 영국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여왕 대관식 때도 내주지 않던 보물이다. 메이 총리는 대(對)테러전 지원, 칼레 난민촌 분담금 확대 등으로 보답했다. 섬나라 영국이 대륙 민족과 섞이며 진정한 유럽 국가로 거듭난 950년 전 역사를 지렛대 삼아 21세기 외교 현안을 푸는 양국 정상의 발상이 놀랍고 부럽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