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107명의 화가가 불러낸 고흐
어린 시절 필자의 방 벽 한쪽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중학생이 돼 처음 미술 교과서를 받아들고 뒷장에 있는 몇 개의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마음의 떨림도 기억난다. 처음 그림이란 것을 좋아하게 된 소중한 화가의 이름은 김환기다. 그때는 그가 그렇게 유명한 화가라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미술 수업시간에는 그 누구도 화가에 관해 가르쳐주거나 그림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이름을 검색해 볼 수도 없었다. 그저 그림이 주는 어떤 감정이 좋았다.

교과서에는 마음을 끄는 좋은 그림이 많았는데 그 크기는 대부분 필자의 손바닥만 했다. 그 그림들을 가위로 오려 방 벽 한쪽에 소중히 붙여 놓았다. 1학년, 2학년 매해 새 미술 교과서를 받을 때마다 필자만의 미술관에도 그림 컬렉션이 늘어났다. 어쩐지 외롭고 마음이 쓸쓸한 날에는 집에 돌아와 밤새 방에 누워 그 그림들을 한없이 보던 기억이 난다.

가장 좋아한 그림의 제목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였는데, 대학생이 돼 전시회를 찾았던 날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선 그림이 너무 컸다.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그림을 보던 필자는 키만 한 그 그림에 압도됐다. 큰 화폭 가득 반복되는 문양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우주를 만난 사람처럼 멍하니 오래도록 그림 앞에 서 있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시절 좋아하던 또 한 명의 화가는 누구나 그러하듯 빈센트 반 고흐였다. 타국의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을 처음 만난 그때 역시 잊기 어렵다. 미술에 무지했던 필자는 원작의 강렬한 붓터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입체감, 형언하기 어려운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색들이 눈앞에서 일렁거렸다. 손을 뻗어 그림을 손으로 느껴보고 싶다는 충동을 잠재우기가 어려울 정도로 고흐의 그림은 대단했고 아름다웠다.

얼마 전 잊고 살던 고흐의 일생을 다룬 영화를 보게 됐다. ‘러빙 빈센트’라는 제목의 그 영화는 천재 화가의 불행한 인생을 다뤘기에 흥미로운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가 놀랍도록 흥미로운 이유는 영화 전체를 고흐의 붓터치와 그림체를 살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95분의 상영시간 내내 고흐의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이 모든 것을 누가 어떻게 만들어냈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놀라운 장면들은 전 세계 오디션을 통해 뽑힌 107명의 화가가 2년간 직접 그린 6만2450점의 유화그림으로 완성된 것이라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고흐의 대표작들을 감상하거나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돈이 없어 모델을 구하지 못해 주변 사람들을 그리곤 했다던 고흐의 작품 속에서 새로운 스토리를 포착해낸 감독의 상상력 또한 영화적 즐거움을 더한다. 기획부터 제작까지 10년이 걸렸다는 영화 앞에서 ‘왜 이렇게 힘든 길을 택한 걸까’라는 촌스러운 질문이 절로 떠오른다.

영화가 시작되면 고흐가 프랑스 아를을 떠나 마지막 생을 보냈다는 오베르의 풍경 속에 필자가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오베르의 들판 위 아무렇게나 캔버스를 펼친 채 붓질을 멈추지 않는 고흐가 옆에 서 있는 듯하다. 상상력과 도전이 빚어낸 놀라운 영화적 체험 속에서 필자의 촌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이윤정 < 영화전문마케터·퍼스트룩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