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시래기 예찬
특별하지도 거창할 것도 없는 소박한 밥상이지만 먹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음식이 누구나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따뜻한 밥 한 공기에 갓 버무린 김치, 된장을 풀어 삼삼하게 끓여낸 시래기 된장국. 그중에서도 시래기는 아무리 자주, 오래 먹어도 물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든든하게 감싸주는 내 인생의 음식이다.

시래기는 무청을 엮어 겨우내 말린 것이다. 차고 그늘진 곳에 빨래 널듯이 가지런히 걸어두고 시래기 말리는 풍광은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 시골 동네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채소가 귀한 겨울철을 대비해 미리 말려 두었다가 그때그때 삶거나 볶아서 한겨울 내내 먹었던 시래기는 먹거리가 넉넉지 않았던 어린 시절 허기를 채우는 겨울철 으뜸 식재료였다.

겨울철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 C를 보충할 수 있고 미네랄, 식이섬유를 많이 함유하고 있어 최근에는 건강식으로도 손꼽힌다. 구수한 맛, 부드러운 식감 등을 장점으로 농한기 농가의 새로운 소득원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농촌진흥청은 생육이 왕성해 엽수가 많고 초록빛도 짙은 양질의 시래기를 생산할 수 있는 육종 소재를 개발해 활용토록 하고 있다. 강원 양구는 전통 시래기의 억센 식감을 꺼리는 젊은 세대를 겨냥해 재배 기간을 줄여 보드랍고 연한 시래기로 가공해 선보이면서 도시인의 미각을 사로잡고 있다. 마침 이달 초부터 양구 펀치볼 햇시래기가 출하되고 있다. 한겨울 저녁 밥상을 풍성하게 채워줄 시래기의 맛있는 변신이 궁금해진다.

몇 년 전 보고서에 의하면 소백산맥과 지리산 언저리의 내륙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장수 지역이 포진해 있다고 한다. 서로 이웃해 있는 구례, 곡성, 순창, 담양은 ‘장수 벨트’로 지정되기도 했다. 장수지역 85세 이상 노인들의 음식문화를 조사해 보니 겨울철 시래기 사랑이 대단한 것으로 나왔다. 시래기 음식에 참기름이나 들깻가루를 가미해 채소에서 부족한 영양분까지 두루 섭취하면서 그들은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하고 있었다.

한식에는 현대인들이 찾는 건강밥상의 해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무엇보다 세월의 삭힌 맛을 사랑하는 우리 정서가 곰삭아 있다. 푹 끓이면 보기에는 볼품없어도 개운한 맛이 나면서 속까지 따뜻하게 채우는 시래기에는 곤궁했던 시절의 그리움이 절절히 녹아 있다. 누구나 스스럼없이 어울리게 하는 음식으로 이만한 게 또 있을까. 시래기의 구수함을 알아가는 젊은 층이 많아진다니 반가운 일이다.

라승용 < 농촌진흥청장 syna6513@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