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내년도 예산안을 통과시킨 뒤 각 당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 공약 1호인 공무원 증원과 재정을 동원한 최저임금 대폭 인상 후속조치 등을 관철시킨 더불어민주당은 ‘만족’이다. 국민의당은 ‘캐스팅보터’로서 존재감을 부각시켰고, 지지기반인 호남지역 예산 확대를 이끌어내는 등의 실속도 챙겼다.

보수정당을 자임하는 자유한국당은 협상에서 제1야당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민주당이 선거구제 개편과 호남 예산 증액 등을 고리로 국민의당을 끌어들여 협상을 주도하면서, 한국당은 결과적으로 들러리만 선 꼴이 됐다. 당내에서조차 ‘한국당 패싱’이라는 자조(自嘲)가 나오고 있다. 한국당이 내놨던 방안들이 무엇 하나 관철된 게 없다보니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하다.

증세문제부터 그렇다. 법인세율 인하를 주장했던 한국당은 여당안에 대한 절충카드로 과세표준 2000억원 초과 대기업에 대해 오히려 1%포인트 인상(22%→23%)하는 안을 제시했다. 함께 내놨던 ‘과표 200억원 이하 중소기업 1%포인트 인하’ 방안을 관철시킨 것도 아니다. 고소득자 소득세율 인상안(과표 3억~5억원 38%→40%, 5억원 초과 40%→42%)도 정부안대로 확정됐다.

영구적 지출 확대로 이어지는 선심성 복지예산항목을 막지 못함으로써 국가 경제 최후 보루인 재정건전성이 불안해졌다. 최저임금 인상 보전을 위한 일자리안정자금 2조9707억원 투입을 정부 원안대로 통과되도록 한 게 단적인 예다. 문재인 정부가 당초 1년만 시행한다던 말을 바꿔 2019년 이후에도 지속하기로 한 것도 견제하지 못했다. 공무원 증원(9475명)은 정부안(1만2000명)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두고두고 재정부담을 안게 됐다.

한국당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체성 위기’다. 보수 가치는 작은 정부, 낮은 세율, 시장경제, 법치주의, 자기책임, 사유재산권 존중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당이 보수 가치를 제대로 안다면 예산안 협상 과정에서 이렇게까지 무기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간 한국당은 선거를 치를 때마다 표를 얻기 위해 보수 가치를 내팽개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명박 정부 때 공정사회를 내세웠고, 2012년 대선 땐 야당이 무색할 정도로 경제민주화 구호를 외쳐 보수층 지지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뒤엔 반성도, 책임지는 사람도 찾기 어려웠다. 보수가치에 충실하지 못하니 정권을 내준 뒤에도 진보 여당과 치열한 이념 경쟁을 벌이며 정책을 견제하는 정책정당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청문회에서 도덕성과 능력 등 부적격으로 확인된 후보자들에 대한 공격의 날은 현 여당의 야당시절에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무뎠다. 지난 9년간 여당으로서 ‘웰빙’에 젖어 살아온 결과일 것이다. 힘이라도 모아야 하지만 여전히 온갖 계파로 갈려 서로 헐뜯는 데 혈안이 돼 있다.

한국당이 바깥 세상 돌아가는 것에 제대로 눈길을 주고 있는가 하는 걱정은 훨씬 더 크다. 미국 공화당, 일본 자유민주당 등 보수당 정권은 법인세율 인하 등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가꾸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한국당에서 이런 공화당과 자민당을 경쟁 상대로 삼아 시장경제를 존중하고 기업에 역동성을 불어넣겠다는 간절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어제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보수우파가 과오를 처절하게 반성하고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지 않고는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수 없다”며 “한국당이 신(新)보수 재건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관건은 실천이다.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가치에 걸맞은 좌표를 제대로 설정하는 일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진보 쪽에 크게 기울어진 정치 지형은 나라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