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정치 지도자의 생각은 진화해야 한다
올해가 고(故)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어서, 박 대통령에 관한 행사와 논의가 많이 나왔다. 이 위대한 지도자를 보다 잘 이해하고 그의 행적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면모 가운데 하나는 그의 생각이 진화한 과정이다.

군사정변을 일으켰을 때, 박 대통령은 그저 정변의 성공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과 동지들의 운명이 걸린 상황에서 권력을 쥔 뒤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백일몽(白日夢)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경제관은 원시적이었다. 정변에 성공한 군부가 맨 먼저 취한 경제적 조치가 재벌 총수들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구속한 일이었다는 사실에서 그의 경제관을 엿볼 수 있다. 군대는 임무와 조직이 시장과 대척적이어서 군인들은 원래 시장에 적대적이다.

실제로 그의 경제관은 만주국을 세운 일본 관동군 참모들의 그것과 흡사하다. 만주국 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만주국군에서 복무했으므로 그는 이상주의적 면모를 지녔던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었고 재벌을 혐오했으며, 만주국 운영에서 공산주의 러시아의 경제개발 계획을 본받았다. 1935년 만주국의 경제를 총괄하게 되자 기시 노부스케는 재벌의 참여 없이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본의 조달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서 재벌의 참여를 유도했다.

박 대통령의 생각이 바뀐 계기는 이병철 당시 삼성 사장과의 만남이었다. 자신이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자 일본에 머물던 이 사장은 바로 돌아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이던 박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기업의 이익보다 많은 세금을 걷도록 한 전시 세법이 기업가를 탈세로 몬다는 것을 지적해서 구속된 재벌 총수들이 풀려나도록 했다. 이어 “기업가의 본분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세금으로 국가 운영을 뒷받침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이 만남에서 박 대통령은 자신의 선입견을 버리고 기업들의 참여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는 길로 들어섰다. 위대한 정치 지도자와 위대한 기업가의 만남은 한국의 행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기시는 일본 경제 재건을 지휘했다. 그는 경제기획청이 세운 경제개발계획을 정부 부처들이 실행하도록 했다. 박 대통령도 경제기획원을 통해서 경제개발을 주도했다.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은 시장을 무시하기 쉽다. 기시와 박 대통령은 정부가 경제개발을 주도하되 시장을 통해서 정책을 추진했다. 거기에 성공의 비밀이 있다.

전쟁으로 산업이 파괴된 일본과 참혹한 전쟁을 겪어 모든 것이 부족한 한국에선 정부가 경제발전을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해외로부터 도입하려면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다. 주류 경제학의 관점에서 살피면 이런 노력은 대규모 시장 설계(market design)다. 시장 설계는 과학철학자 대니얼 데넷이 설계 공간(design space)이라 부른 개념으로 수렴된다. 생태계에서 어떤 혁신이 나오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단세포 생물이 결합해서 다세포 생물이 나오자 생태계가 폭발적으로 다양해진 것은 전형적이다. 사회와 경제에서도 마찬가지다.

포항종합제철소와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자 새로운 시장과 기업이 나올 수 있었다. 중화학공업 개발로 가능해진 가능성들은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다. 중화학공업으로 우리 사회가 도약했는데, 중화학공업에 관한 통계에선 그 효과가 잘 잡히지 않는 까닭이 거기 있다.

군사정변 직후의 원시적 경제관에서 사회 변혁 가능성을 포함한 후기의 경제관으로 박 대통령 생각이 진화한 것은 대단한 성취다. 그가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향상시켜 ‘5·16’을 흔한 군사정변에서 드문 사회혁명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요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런 정신적 유연성이다.

누구도 준비된 상태에서 대통령이 돼 나라를 이끌 수는 없다. 좁은 시야에서 충분치 못한 정보에 바탕을 두고 흔히 작은 이익집단의 견해를 대변하는 정책들이 모여서 공약으로 제시된다. 자연히 대통령이 되면 빠르게 자신의 생각을 진화시켜야 한다. 박 대통령의 행적은 흔히 잊히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복거일 < 사회평론가·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