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순의 논점과 관점] 세금납부 기피사유가 많으면…
흔쾌히 세금을 낸다는 한국의 납세자는 10명 중 1명뿐이라는 설문조사가 있었다. ‘한국에서 세금 내기 싫어하는 이유 9가지’라는 납세자연맹의 최근 분석자료는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

‘내가 낸 세금이 낭비되고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첫째 이유부터 정부는 새겨들어야 한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주변에 세금 안 내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이유도 있다. 지하경제 때문이라는 설명이지만, 근로소득자의 절반이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 제도적 오류, 법적 부실이 더 문제다.

'9가지 이유' 정부·국회 요인 많아

‘백골징포 같은 불합리한 세금이 많다’ ‘세법이 너무 복잡하다’는 것도 정부와 국회가 초래한 기피 사유다. ‘정부 신뢰가 낮은 상태에서 높은 세율은 조세 회피를 부추긴다’ ‘세법대로 내면 실제 이익보다 세금을 더 내게 된다’는 대목에서는 올해 20조원의 초과세수가 예상된다는 정부의 징세 전망이 떠오른다. 이런데도 정기국회로 간 법인세와 소득세 인상안은 정당한가. ‘세무조사를 당해도 세금을 줄일 여지도 있다’는 대목에는 징세행정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다.

절대왕정도 무너뜨린 게 무리한 세금이다. 우리 국회가 세금에 너무 쉽게 접근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공부가 덜된 탓 같다. 세목 신설도, 세율 인상도 ‘득표 유불리’ 차원의 계산에서 입법화하려 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경제 발전의 원리, 국가 유지의 기본원칙, 사회를 떠받치는 본원적 의미의 정의나 형평에 대한 고민이 없는 편한 정치다. 충분한 공론도, 최소한의 당사자 동의도 없는 과세라면 법을 내세운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여당 대표 추미애 의원의 거침없는 보유세 강화 발언도 그런 측면에서 주목된다. 추 대표는 19세기 토지공유주의자 헨리 조지를 끌어내 토론회를 열었고, 토지 공(公)개념과 ‘국유화’도 제기했다. “한·미 동맹이 깨져도…”라던 문정인 청와대 특보 발언 같은 충격요법식 접근법이다. ‘자극적 논쟁거리’를 던져두면 보유세 증세 정도는 쉽게 달성할 것이라는 정치공학적 셈법이 느껴진다.

특정 지역 집값을 의식해 국가 운영의 기본축인 세제에 쉽게 손대려는 발상부터 잘못됐다. “미국은 주택 보유세율이 높다”는 주장도 한국의 고율 양도세나 취득세가 미국에는 없다는 점은 외면한 여론몰이다. 주식 예금 자동차 다 두고 부동산 보유세만 강화하려면 더 깊은 공론이 필요하다. ‘성실납세를 해도 세금 리스크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기피 이유가 설득력을 갖는 배경이다. ‘세금 리스크’는 세제·세정에 안정성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정책 리스크는 저개발국의 일반적 특성이다. 기술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제도의 경쟁’에서 앞설 때 선진국이 된다.

너무 나간 추미애의 '보유세 증세

‘성실납세가 옳다는 사회적 규범이 형성되지 않은 사회’라는 이유도 있다. 많은 게 내포된 기피 사유다. 사회적 규범은 정부와 납세자인 국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국이 근대국가로의 이행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것과 무관치 않다. 헌법상 납세 의무도 외국 법을 베낀 것일 뿐 사회적 합의가 부족했다. 아직도 공화국이나 자유주의의 바탕을 모르고, 시민·국민·백성을 구별 못하고, 전(前)근대 왕정의 신하·관료와 현대국가 직업공무원을 혼동해 말하는 사회다.

세금의 이해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 국가관의 출발점이다. 정부도 납세자도 더 성찰하고, 세금 내기 싫다는 이유를 하나씩 없애 나가야 한다. 엊그제 미국 갑부 400여 명이 “내 세금을 깎지 말아 달라”고 의회에 청원한 것도 납세 기피 사유가 적은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금 납부에 보람과 긍지가 없는 한 국가 발전도 없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