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세련된 좌파 vs 만만한 우파
“세련된 좌파들은 전열이 정비되면 우파 궤멸작전에 돌입할 것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5월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전(前) 정권도 모자라 MB 정권까지 탈탈 터는 걸 보면 그의 예견이 들어맞은 셈이다.

우파 가치를 신뢰하는 국민들로선 복장 터질 만한 장면이 있다. 지난 7월 한국당의 ‘보수가치 재정립’ 2차 토론회 때다. 좌중을 돌아보니 왜 지리멸렬인지 알 만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킨 현역 의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3차 토론회는 아예 기약도 없다. 총선은 3년 뒤이니 당장 관심 없다는 건가. 선거 때만 와글대는 ‘떴다방 보수’의 현주소다.

유권자 시각에서 비교해 보자.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옷 잘 입고,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한 좌파들이 차고도 넘친다. 좌파이념을 패션처럼 치장하고 소비하는 ‘패션좌파’의 시대다. 게다가 좌파라면 누구나 지적 세례도 거친다. 86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탐독한 공통 경험이 있다. 지금도 서점가 베스트셀러는 좌파의 최신 저작들로 도배돼 있다. 그게 팔리기 때문이다. ‘변호인’ ‘광해’ ‘베테랑’ ‘내부자들’ 등 기득권과 권력에 날을 세운 1000만 영화들이 미래세대까지 강하게 흡인한다.

우파들은 어떤가. 우파 가치는 상당한 이해와 숙고가 필요하다. 그런데 공부와는 담쌓은 게 우파다. 저술은 좌파의 1%도 못 된다. 공유할 지적 자산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심지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완역자가 마르크스 전공 교수다. 그래도 복거일, 민경국 등이 꾸준히 좋은 저작들을 내지만 거의 외면당한다. 우파 가치를 지키는 데 지갑을 열지도 않는다. 하다못해 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도 밀린다.

젊은 층에게 좌파는 세련된 집단, 우파는 기득권 꼰대 집단으로 투영된다. 그러니 ‘세련된 좌파’들에겐 우파가 얼마나 만만해 보이겠나.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이 진작에 ‘만만한 우파’를 잘 묘사했다. “한국의 우파들은 일주일에 세 번 골프장 가고, 두 번 룸살롱 가느라 아주 스케줄 표가 꽉꽉 찬다. 지독하게 교양, 상식과는 담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1인분 인생》, 2012)

하지만 무서운 우파도 가끔 있다. “강남 교보문고에서 종종 마주치는 아우디 타는 부부가 있었다. 외제차 타는 사람은 하나도 안 무서운데, 서점에 와서 책과 CD를 양손 가득히 사들고 가는 젊은 부부, 그들은 정말 무서웠다.”

유럽에는 그런 우파가 흔하다고 한다. 우파를 이기려고 좌파는 더 죽어라 책을 읽고 날카롭게 공격해야 하고, 우파도 방어하기 위해 더 강해지고 독서를 많이 한다는 게 우석훈의 설명이다.

좌파는 노무현 정권의 실패를 곱씹으며 와신상담했다.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감추지 않는다. 격식 파괴, 소통 이미지로 중도보수층까지 외연을 넓혔다. 차기 잠룡은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 좌파 지식층과 시민단체 등 외곽 지원그룹도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다. 진지는 더 공고해졌고, 치열한 내부경쟁 속에 전투력은 배가됐다. 이런 좌파에 비해 우파는 시쳇말로 구려 보인다.

정당은 ‘이념의 유통업’이라는데 보수정당 구성원들조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헌법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식당 주인이 자기도 안 먹는 음식을 파는데 장사가 될까. 자기절제가 없고, 숙고가 없고, 쇄신도 못 하면서 보수간판을 내거는 건 우파 가치에 대한 모독이다.

좌파가 두려워하는 우파는 골프장이나 아스팔트가 아니라 서점과 도서관에 있을 때다. 이제라도 삶의 진정성을 실천하고, 자유·시장·법치·정의·경쟁 등 우파 가치 ‘열공’만이 거듭나는 길이다. “지식이 지력이 되고, 그것이 신념이 되려면 최소 20여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레이건 평전)고 했다. 때마침 기나긴 연휴다. 하이에크, 미제스, 바스티아, 버크, 포브스, 복거일, 민경국 등 누구든 다 좋다. 우파의 지혜를 정독해 보시길.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