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정치가 가둬버린 서비스업
카를 마르크스는 기술진보가 경제성장을 가져온다는 걸 알았다. 문제는 기술진보 방향을 ‘노동절약적’이라고 규정한 데서 비롯됐다. 그대로 두면 임금은 노동자들이 먹고 죽지 않을 수준으로 하락하고 자본주의 경제는 결국 파멸할 것이라는 예언이 그렇다. 하지만 역사적 경험은 기술진보가 항상, 일방적으로 노동절약적인 것만은 아님을 보여줬다.

기술진보에는 노동절약과 자본절약 두 측면이 존재한다. 제조업에 국한하면 기술진보가 ‘노동절약적’이어도 산업 전체적으로는 ‘자본절약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기술진보가 고용에 미치는 채널에도 일자리를 줄이는 ‘대체효과’뿐 아니라 새 일자리를 창출하는 ‘보완효과’ ‘생산성효과’가 있다. 제품·공정혁신 등으로 단기적으로는 실업이 발생해도 장기적으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보상이론’이 나오는 이유다. 거꾸로 표현하면 정치가 특정 일자리를 보호하려 들면 전체 일자리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복잡계 패러독스’가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이런 기술진보 과정에서 사람이 이동해 가는 분야가 서비스업이란 점이다. 경제가 선진화할수록 서비스업 비중이 커지고, 여기서 일자리가 창출되면서 제조업 부문에서의 노동절약 성향을 상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마르크스가 서비스업의 잠재력을 인지했다면 가설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문재인 정부 인수위원회 역할을 하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와 일자리위원회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을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더니 출구를 찾았다고 한다. “보건의료는 서비스업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더불어민주당이 야당 시절 이 법을 ‘의료 민영화’라는 이념적 프레임으로 저지하더니, 해법도 정의와 범위를 맘대로 갈아치우는 식이다. 한국만 보건의료가 서비스업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인가. 전형적인 수구반동(守舊反動) 수법이다.

콜린 G 클라크는 1940년 《경제 진보의 조건》에서 ‘제3차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업에 자리를 찾아줬다. 당시만 해도 서비스업은 무역이 용이하지 않다는 설명이 당연하게 들렸을 것이다. 국가마다 차이는 있지만 서비스업은 대개 제조업에 비해 규제도 많고 생산성도 낮다. ‘서비스업=내수’ 고정관념이 서비스업에 대한 정치적 보호로 이어졌을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서비스업의 비(非)교역성이 깨지고 글로벌 서비스 기업이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다. 국가별 서비스업 경쟁력이 확연하게 엇갈린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왔을까. 기술진보의 수용성, 개방과 혁신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선진국일수록 서비스업이 돈 잘 버는 헬스케어, 금융 등으로 이동하고, 그렇지 않은 국가는 수입이 낮은 곳에서 과당경쟁을 벌인다. 서비스업 후진국일수록 정치적 민감성은 더 높아졌다는 의미다.

여기에 선진국에서 돈 잘 버는 분야가 한국에선 규제 때문에 탈출구 역할을 못 해 준다. 규제는 연구개발(R&D) 동기마저 앗아가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가 높다는 한국이 서비스업에선 맥을 못 추는 이유다. 정치가 위·아래 서비스업을 다 가둔 꼴이다.

결과는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서비스업 생산성이다. 제조업 생산성 대비 45%에 불과하다. 4차 산업혁명을 두고 ‘제조업의 서비스화’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경계 붕괴’라는 말이 나오는가 하면, 아예 ‘서비스 혁명’이라는 주장도 등장한다. 어느 쪽이든 서비스업 생산성을 높이지 않는 한 한국은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자칫하다간 서비스업이 제조업의 발목까지 잡게 생겼다.

‘사람 중심 경제’를 내건 문재인 정부가 베팅할 곳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할 공공일자리가 아니다. 일자리위원회와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합쳐서라도 서비스업에 승부를 거는 건 어떤가. 성장과 일자리, 두 마리 토끼 잡기가 불가능하지 않다. 문재인 정부를 창출했다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노조, 협회 등 이해단체들을 떨쳐낼 용기만 있다면.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