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국민 모두 '서민'이 돼가는 나라
대출 없고, 30평 이상 아파트, 월수입 500만원 이상, 중형차 이상, 예금 1억원 이상, 해외여행 연 1회 이상, 골프 월 1회 이상…. 한국인이 생각하는 심리적 중산층의 모습이다. 사실 이 정도라면 소득 상위 10%에 해당할 것이다. 여기서 한두 가지라도 미달하면 스스로 중산층이 아니라고 여기는 게 보통이다.

그래선가. 실제 현실과 인식 사이에 간극이 크다. 통계청의 소득계층별 분포는 지난해 △상위(중위소득의 150% 이상) 19.6% △중위(50~150%) 65.7% △하위(50% 미만) 14.7%였다. 반면 주관적 설문(2015년)에선 상류층 2.4%, 중산층 53.0%, 하류층 44.6%였다. 주관적 상류·중산층은 줄고 하류층만 빵빵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위소득 계층은 60%대에서 별 변화가 없다.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 인식이 진실이 된 셈이다.

중산층 소속감이 낮아진 이들은 자신을 ‘서민’에 귀속시킨다. 국민 86%가 ‘나는 서민’이라고 답한 보건사회연구원 설문 결과도 있다. 보통사람뿐 아니라 누가 봐도 충분히 가진 이들조차 “우리 같은 서민…”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비교 대상이 늘 ‘나보다 더 가진 사람들’인 탓이다. 억대 연봉자들 간에도 빈부격차를 느낀다지 않는가. 연봉 1억원은 2억원이 부럽고, 동남아 여행 다녀온 사람은 미국·유럽 여행자가 부럽다. SNS에 가득한 타인들의 과장된 행복은 상대적 박탈감을 부채질한다.

눈치 빠른 정치권이 그 인식의 틈새를 비집고 득표 극대화를 도모한다. 세상을 강자와 약자로 나누고 약자의 로빈후드를 자처하는 식이다. 역대 정권마다 ‘친(親)서민’을 내세우지 않은 경우가 없는 이유다. 좌우 구분도 없다. 서민물가, 서민주택, 서민금융, 서민 통신비, 서민 채무경감…. 복지는 넓히다 못해 ‘하위 70%’라는 해괴한 기준까지 만들어냈다.

하지만 어느 정권에서건 서민이 행복해졌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토록 서민을 위한다면서 되레 물가가 오르고, 집값이 뛰고, 취업은 힘들고, 살기 빠듯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서민을 위한다는 정부일수록 거꾸로 서민의 삶은 고단해졌다. 실체도 불분명한 서민을 대상으로 공중에 산탄총 쏘듯 정책을 편 결과다. ‘정치가 내 삶을 바꾼다’는 구호는 그래서 늘 공허하게 들린다.

본래 서민은 성(姓)도 없고 벼슬도 없는 사람을 뜻하는 과거 왕조시대의 언어다. 사농공상, 관존민비에다 신분이 세습되던 시절의 무지렁이 백성을 가리켰다. 요즘 ‘나는 서민’이란 인식이 팽배한 것도 계층이동 사다리가 사라졌다는 자포자기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

이런 환경에선 국가 의존증은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른다. 자유주의 대신 정부 개입주의가 득세하게 된 근본 원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 책임으로 여기는 것이다. 공짜는 부자도 좋아한다. 믿기 어렵겠지만 자기 자식이 공부 못하는 것도 ‘나라 탓’이라는 사람들을 실제로 목격했다.

결국 해답은 경제·사회의 활력을 되살리는 것뿐이다. 장기 저성장이 몰고온 집단 무기력증이 국가의존증을 배양하는 온상이 됐다. 애덤 스미스는 노동자의 행복감은 임금의 절대 수준이 아니라 임금이 정체됐느냐, 상승 추세냐에 달렸다고 갈파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질 것이란 기대가 있다면 ‘자각(自覺) 중산층’은 저절로 두터워질 것이다. 1980~90년대 초 고성장기에 국민의 중산층 인식은 80%에 달했던 적도 있다.

정치가 뜻도 모호한 서민이란 정서적 용어를 남발할수록 더 나은 삶을 개척하려는 개개인의 가치는 훼손된다. 국민 행복도 함부로 약속하지 말아야 한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지고, 내 자식 내가 건사한다”던 어느 촌로의 고집스런 일갈이 새삼 떠오른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