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퇴행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상 모든 정치 체제와의 경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뒀다고 말한 사람은 프랜시스 후쿠야마였다. 그러나 성급한 판단이었던 것 같다. 자유민주주의는 여전히 많은 지역에서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면서 예상보다 더디게 전진하고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심지어 패퇴하고 있다. 아니 패퇴하는 지역이 압도적으로 많다.

우선 아시아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중국은 독재를 더해가고 있고, 인도 민주주의는 정치적 혼란의 대명사처럼 들린다. ‘아랍의 봄’은 차례로 이슬람국가(IS)에 자리를 내어 주었고, 아프리카에서 민주주의는 여전히 딴 동네 이야기다. 러시아의 푸틴은 새로운 차르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남미 민주주의는 베네수엘라든 브라질이든 어느 한 군데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지 않다.

‘자유민주주의가 보편적 제도이며, 인류 문명의 진행 노정이 있는 것이어서 어느 지역이나 국가든 사회 발전에 따라 순조롭게 그 체제를 수용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이미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것은 오히려 서구적 현상일 뿐이며 20세기 초에 이미 민주주의에 도달했던 몇몇 선진 국가들과 백인에게서만 가능한 체제가 아닌가 하는 비관적 해석이 등장할 지경이다. 1차 세계대전이 전 유럽에 민주주의를 확고하게 만들었듯이 2차 세계대전이 아시아 독립국들에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심어줄 것이라던 기대 역시 지금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다.

시장경제 체제가 경제성장을 만들어 내고 경제성장이 중산층과 교육받은 계층을 만들어 내면서 서서히 자유민주주의를 길러낼 것이라는 전망도 지금은 ‘그따위 이론’이 돼 접어야 할 판이다. 중국이 그런 대표적 사례다. 중국은 국민소득 5000달러를 넘어 8000달러에 이르고도 소위 ‘민주적 돌파(breakthrough)’가 전혀 가시권에조차 들어오지 않고 있다. 천안문 사건은 이미 과거의 기록이 되고 말아 더는 살아있는 민주화 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남미가 직면하고 있는 모순들도 그렇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도처에서 실패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지체 현상을 보이면서 사회갈등을 고조시키고 있는 가장 극적인 곳이 한국이다. 한때 한국 민주주의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87시민혁명을 거쳐낸 자유의 체제라는 칭송까지 받았다. 한국인 스스로도 그것을 자랑삼지 않았던가. 그러나 선거와 법치를 골자로 하는 절제된 체제로서의 자유민주주의는 한국에서 지난 수개월 동안 대중민주주의 혹은 광장 민주주의에 기어이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권력의 즉각적인 교체를 원하는 촛불 민중은 극적인 승리를 거뒀고 민주주의를 대중의 권력화로 해석하는 급진적, 그리고 반(反)자유주의적 충동만이 정치전선을 지배하고 있다. 그렇게 현직 대통령은 근거도 의심스러운 허다한 사소한 이유로 임기가 중단된 채 축출됐고, 오늘 차기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게 됐다. 언론은 민중을 부추겼고 붉은 민주주의가 광장을 점령하는 수개월의 광풍이 지난 다음 번갯불에 콩을 볶아야 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선거가 닥친 것이다.

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중이 주인이 되는 제도인가, 아니면 평화로운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는 희망일 뿐인가. 민주주의는 군중들의 열기가 터지는 광장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만의 공간에서 행사되는 투표소에 존재하는 것인가. 민주주의는 너무도 종류가 많아서 무엇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혼란스럽다. 정치는 인간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계속될 것이고, 공동체가 지속하는 한 새로운 정치제도가 이어질 것이다.

역사의 종말을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 그것은 마치 최후의 물리법칙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 최후의 물리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으로 이미 입증됐다고 하겠지만 정치는 종종 뒤로도 움직일 것이다. 선거일 아침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투표뿐인 그런 사람들이 유일하게 반격을 가할 수 있는 바로 그날이다.

정규재 논설고문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