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우리는 안보와 생명을 빚진 자들입니다"
경기도 연천 임진강 인근 금굴산 기슭에 영국군 화장장 터가 있다. 부서진 건물의 벽체 일부와 굴뚝만이 남아 있는 이곳에서, 영국군을 비롯한 수천명의 유엔군 전사자들이 한 줌의 재가 돼 본국으로 돌아갔다.

지금으로부터 꼭 66년 전이다. 1951년 4월22일부터 25일까지 영국군 750명이 임진강변을 기습 포위한 중공군 4만2000여명과 싸웠다. 세계 전쟁사(史)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56 대 1의 전투였다. 60여명만이 목숨을 건졌지만, 나흘 동안 버티며 적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 덕분에 국군과 유엔군은 서부전선에서 서울 방어선을 재구축할 시간을 벌었다.

화장터에서 멀지 않은 감악산 설마리 계곡 참전기념비 앞에는 영국 들판에서 흔하게 피는 양귀비꽃을 형상화한 빨간 화환이 놓여 있다. 전몰용사들의 몸에서 솟구쳐 나온 선혈이 엉킨 듯한 모습에 숙연해진다.

66년 전 이맘때 또 하나의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다. 1951년 4월23일부터 이틀 동안 벌어진 ‘가평 전투’다. 중공군 118사단은 가평천 골짜기를 이용해 서울~춘천 간 도로를 차단하고는 연합군 전선을 갈라놓는 작전에 들어갔다. 한국군 6사단을 제압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한 터라 한껏 기고만장해 있었다. 서울 재입성을 눈앞에 뒀다고 자축하던 순간, 호주군 3대대가 기습 공격했다.

허를 찔린 적들은 1박2일 내내 우왕좌왕했고, 북한강 북쪽으로 도망쳤다. 호주군 34명(3명 실종)과 중공군 약 1만명의 목숨을 맞바꾼 ‘대첩’ 덕분에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연천과 가평에서의 혈투는 중공군의 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문산에서 화천에 이르는 110㎞ 전선에 36개 사단(북한군 1개 군단 포함) 42만여 병력을 투입한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무력화됐고, 지금의 휴전선 일대로 전선이 고착됐다.

그런 전과(戰果)는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 영국인 기자 앤드루 새먼은 임진강 전투 생존자 50여명을 인터뷰해서 펴낸 책 《마지막 한발》에서 처절했던 66년 전을 이렇게 증언한다. “보급로가 끊겨 허기와 갈증, 졸음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최후의 백병전을 벌였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압록강변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곳은 전쟁터보다 더한 지옥이었다. 굶주림과 질병, 폭력, 학대는 기본이었고 세뇌교육까지 받아야 했다. 많은 군인들이 그곳에서 또 죽어갔다.”

우리가 해외 참전국들과,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빚을 졌는지, 최소한의 셈은 해둬야 한다. 6·25전란 동안 미국이 30만2483명, 영국 1만4198명, 캐나다 6146명, 터키 5455명, 호주 2282명, 태국 2274명, 필리핀 1496명, 뉴질랜드 1389명, 에티오피아 1271명, 그리스 1263명, 남아프리카공화국 1255명, 프랑스 1185명, 콜롬비아 1068명, 벨기에 900명, 네덜란드 819명, 룩셈부르크가 48명을 파병했다. 절반 이상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중상을 입었다.

생존 장병들 상당수는 전장에서의 악몽으로 인한 만성 정신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다. 정신과 의사들이 이들에게 권유하는 ‘최고의 치료법’이 있다. 한국 방문이다. 목숨을 걸고 지켜준 나라가 얼마나 눈부시게 발전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나은 치료는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매년 주요 전투 기념일에 맞춰 진행하고 있는 유엔군 참전용사 방한 사업은 이런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6·25 60주년을 맞은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유엔군 참전용사 및 가족 3만1000여명이 한국을 다녀갔고, 지난 23일에는 가평전투 참전용사 40명과 이들의 가족 등 80여명이 방한했다.

“한국인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일군 성공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하지만 그 혹독했던 시절의 나락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애써 이룬 것들을 한순간에 날려버릴지도 모를 정치판의 혼돈과 무책임에 암울해지는 이즈음, 새먼의 당부를 더욱 곱씹게 된다.

이학영 논설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