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깨우는 한시 (31)] 만수고저난만홍(滿樹高底爛漫紅) 일편서비일편동(一片西飛一片東)
무학조원(無學祖元, 1226~1286) 선사의 ‘제앵화(題櫻花·벚꽃에 붙여)’라는 4행시의 첫줄과 끝줄이다. 선사는 중국 저장(浙江)성 출신으로 항저우(杭州) 정자사(淨慈寺)로 출가했고 임제종 무준사범(無準師範, 1178~1249) 문하에서 수학했다. 1279년 54세 때 닝보(寧波) 천동산(天童山)을 출발해 일본으로 몸을 옮겼다. 이후 8년 동안 활동하다가 61세로 입적했으며 《불광국사어록(佛光國師語錄)》을 남겼다. 비슷한 시기에 난계도륭(蘭溪道隆, 1213~1278) 선사도 일본으로 건너왔다. 송(宋)나라가 기울어갈 무렵 귀화한 선승들에 의해 일본 시는 중국 선시(禪詩)와 자연스럽게 융합이 이뤄졌다.

중국 혹은 한국의 한시에서 벚꽃을 소재로 지은 시는 흔하지 않다. 벚꽃 한시의 작가는 대부분 일본 시인이다. 조원선사의 벚꽃 시 배경 역시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중국 출신이 지은 일본시로 분류할 수 있겠다. 물론 ‘내 것 네 것’을 나누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기는 하다. 첫 행은 개화, 마지막 행은 낙화를 읊었다. 피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사이에 또 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화도 순식간이지만 낙화도 순식간이다. 그래서 한 작품 속에서 피고 지는 것을 동시에 담았다.

지는 모습까지 사랑받는 꽃이 벚꽃이다.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풍광이 얼마나 인상적인지 따로 ‘앵취설(櫻吹雪·사쿠라후부키)’이라고 칭했다. 이런 찰나적 미학을 승려시인 사이교(西行, 1118~1190)는 “왜 벚꽃은 찬사를 보내는 군중 눈 앞에서 그토록 무정하게 떠나가는가?”라고 읊조렸다. 그는 사쿠라(櫻) 마니아 시인답게 떨어지는 벚꽃 아래에서 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그의 묘를 오백년 후에 어떤 후학이 발견하게 된다. 무덤 주변에 천그루의 벚나무를 심는 것으로 조문을 대신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뒷사람들은 ‘서행스님의 벚꽃(西行櫻·사이교사쿠라)’이라고 불렀다.

발길 닿는 곳마다 벚꽃천지다. 필 때도 설레지만 질 때는 더 설렌다는 말을 실감하는 봄날이다.

원철 < 스님(조계종 포교연구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