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추한 것도 예술적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예술만큼 추한’이라는 전시가 서울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장에서는 봄처럼 따스하고 화사하며 뽀얀 그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일그러지고 구겨진 인물, 경악하는 표정, 오물을 끼얹는 비디오, 썩어가는 분비물 그리고 쓸모 없어진 기계의 파편이 늘어서 있을 뿐이다.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내장을 들춰낸 것 같은 작품들은 추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관람자의 마음을 끈다. 이 전시는 미술이 오직 우아한 것, 위대한 것, 영웅적인 것만을 보여주려 했던, 어떻게 보면 표피적이고 허위적일 수 있는 전통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의 이면 또는 그것의 여러 면모를 다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미와 추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이 전시의 제목에서 문득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을 떠올렸다. 이 책에서 위고는 집시 아가씨 에스메랄다의 불가해한 매력을 그리고 성당 종지기 카지모도의 괴기스러움을 몇 장씩이나 들여 대조적으로 묘사한다. 에스메랄다는 그냥 스치고 지나갈 수 없는 미모에 상냥한 미소로 인해 거리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행복해지는 존재다. 이에 반해 카지모도는 사납고 거친 성격에 외모는 흉물 그 자체다. 등뼈가 활처럼 휘고 머리는 양어깨 속에 푹 파묻혀 있으며 무사마귀가 난 애꾸눈에 두 다리는 뒤틀려 뒤뚱거린다.

에스메랄다는 노트르담 성당 밖의 햇빛 좋은 거리를 주름잡으며 살고 카지모도는 어두운 성당 안 구석구석을 누비며 지낸다. 이렇게 노트르담 성당의 벽을 사이에 둔 미와 추, 빛과 어두움은 곧 숙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흉측한 카지모도가 나타나면 모두가 그를 쫓아내려 돌을 던졌지만 오직 에스메랄다만이 피하지 않고 따스한 말을 건네줬다. 이는 마치 예수가 돌을 맞는 창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준 것과 같은 일종의 구원이었다.

꼽추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저주받은 추물이지만 마음속 깊이 한 여인을 사랑할 수 있어서 더할 수 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생명을 다 내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지고지순한 꼽추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승화돼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준다. 반면 에스메랄다는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축복받은 미녀지만 그 매력이 원인이 돼 결국엔 모두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려지는 최고로 불행한 여인으로 추락하고 만다.

꼽추는 연모하는 에스메랄다를 억울한 교수형에서 구해내지는 못하지만 그녀를 모략한 자를 죽이고 자신도 함께 죽음으로써 그녀와 합일한다. 세월이 흘러 에스메랄다의 해골을 꼭 껴안고 있는 카지모도의 해골이 발견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끌어안고 있는 이 두 사람처럼 미와 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이어져 있다. 어쩌면 추는 미가 추락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상황에 따라 추는 미가 되기도 하고 미는 추로 바뀌기도 한다. 깨끗해서 예쁜 것이 때가 타면 보기 싫게 되고 싱싱해서 탐나던 것이 부패하면 썩은 냄새를 뿜어내기도 한다. 건강하던 젊음은 쇠하게 되면 병든 늙음으로 변하는 것을 피하기 어렵고 우유 같은 피부일지라도 상처를 내면 혐오스러운 피와 뼈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아름다워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바로 그것이 다른 맥락에 처하면 추함이 되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어느 대학의 행글라이더 동아리 이름이 ‘이카로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욕으로 추락해버린 비극적인 인물을 하필 단체이름으로 택하다니 왠지 불길하게 들렸었다. 하지만 방점을 다르게 놓고 보니 이카로스는 사람으로 태어나 원 없이 하늘을 높이 날아본 최고 행운아의 이름이기도 했다. 행글라이더 동아리 친구들은 이카로스처럼 상공을 훨훨 누비고 싶은 희망으로 그 이름을 택했을 것이다. 이카로스의 불행과 행운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듯 미와 추도 마찬가지다. 지금 끔찍한 나락에 떨어져 있는 추한 어떤 것을 우리가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이유는 그 추락이 한때는 멋지고 황홀했던 기억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주은 < 건국대 교수·미술사 myjoolee@konkuk.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