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설의 경영 업그레이드] '몽펠르랭' 70년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다. 사회주의는 여간해서 깨지지 않는다. 사회주의 공산권이 무너진 지가 오래지만 사촌쯤 되는 평등주의, 복지주의의 위세는 날로 더해 간다. 세상의 온갖 불평등을 대중의 힘으로 바로잡겠다는 ‘낭만적’ 아젠다는 너무 잘 먹힌다. 사회주의적이어야 지식인 대우를 받는 세태도 그렇다. 정치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사회주의 맞선 자유주의의 본산

70년 전에도 꼭 그랬다. 전체주의의 망령이 일으킨 2차대전이 끝난 뒤에도 전체주의의 일종인 사회주의는 오히려 더 큰 힘을 내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는 1947년 4월2일 스위스의 작은 도시 몽펠르랭으로 자유주의자들을 초청했다. 39명이 모였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석학 루트비히 폰 미제스, 나중에 자유주의 경제학의 최고봉이 되는 밀턴 프리드먼(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현대 과학철학의 태두 칼 포퍼 등이 참석했다. 당시 이들이 창립한 학회가 몽펠르랭소사이어티(MPS: Mont Pelerin Society)다. 이들은 “문명의 중심가치가 위기에 빠지고 모든 것을 부정하는 역사관이 넘쳐나며 법의 질서가 붕괴됐다”고 개탄했다. 이들은 약탈적인 사회주의로부터 ‘생각과 표현의 자유’ ‘사유재산권’과 ‘경쟁적 시장’ 등의 가치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MPS 초기는 순탄치 못했다. 1950~1970년대엔 사회주의가 광범하게 퍼진 데다 서방진영에서도 케인스 중심의 정부 간섭주의가 주류 경제학으로 자리 잡고 있어 뚫지를 못했다. 특히 사회주의는 집요했다. 자유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던 ‘리버럴(liberal)’을 미국에서는 정치사회주의자들이 선점해버렸다. ‘리버럴’이 정부 권한을 강화하고 간섭하는 개념으로 변질되자 미국 자유주의자들은 할 수 없이 스스로를 ‘리버테리언(Libertarian)’이라고 불러야 했다.

몽펠르랭 석학들이 꿈꾼 미래가 실현된 것은 1970~1980년대였다. 영국병이 한창이던 1979년 정권을 잡은 대처 총리는 어릴 때부터 탐독하던 《노예의 길》의 저자 하이에크를 불러 조언을 구했다. 대처리즘은 그렇게 나왔다. 스태그플레이션에다 쌍둥이 적자로 신음하던 미국은 1980년대에 자유주의로 다시 살아났다. 그게 레이거노믹스다. 개혁·개방을 천명한 중국의 덩샤오핑이 1978년 화두를 나눈 상대도 하이에크였다. “어떻게 하면 인민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할까요?” “농민들에게 생산한 농산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도록 해보세요.”

한국 첫총회 5월7~10일 서울서

자유와 소유권, 그리고 정부 간섭의 최소화를 주장한 자유주의는 마침내 승리를 거뒀다. 몽펠르랭 석학들의 이런 노력은 그러나 금방 잊혀졌다. 좌파는 환경 인권 등으로 분야를 넓혀가며 사회주의 환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기어이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을 침몰시키고도 멈출 줄을 모른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의 평등주의와 복지주의가 경제적 자유의 숨통을 끊어놓기 직전이다. 대선주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시장경제와 성장을 얘기하지 않는다.

세계 현대사의 굴곡마다 북극성 역할을 해온 MPS가 창립 70주년 기념 총회를 5월7~10일 서울에서 갖는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MPS 총회다. 마침 행사 기간에 대선이 있다. 새 대통령은 ‘경제적 자유: 번영으로 가는 길’이란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길 기대한다.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