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봉진 저널] '국회독재'에 대한 항거
헌법재판소가 운명의 교차로 한복판에 서서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든 수긍하지 못하는 쪽의 비난 화살이 죽음의 무덤처럼 쌓일 것이 뻔하다. 이런 땐 아예 모든 서류를 덮어버리고 스스로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자기만의 마음속 여행을 떠나는 게 혜안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엉뚱한 제안일 수 있으나 눈을 감고 미 대륙의 한복판 캔자스주를 찾아가면 “데자뷔!”를 외칠 수 있다. 우리나라 현 상황과 판박이였던 역사적 사건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는 1868년. 암살당한 링컨의 뒤를 이은 대통령인 앤드루 존슨과 의회는 끊임없는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대통령을 옥죄려는 무리한 법 제정과 이에 저항하려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패전으로 피폐해진 남부의 복구 문제를 놓고도 연민의 정으로 접근하려 했던 링컨 대통령의 정책을 계승하려는 존슨과 패전 당사자로서 남부가 당하는 고초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며 “거칠게 다뤄야 한다”는 극단적 공화당 의원들 사이의 투쟁은 극과 극을 달리는 양상이었다. 급기야 공화당원들은 의회가 인준한 공직자를 대통령이 면직시키려면 상원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독소조항을 넣은 공직임기법을 제정, 대통령의 인사권까지 제약했다. 이를 무력화하려 했던 존슨은 공화당의 프락치라고 여기던 에드윈 스탠튼 전쟁장관을 파면하고 ,(스탠튼이 감히 대들 수 없는) 남북전쟁의 영웅 그랜트 장군을 그 자리에 임명하면서 미국사회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결국 존슨에 대한 공화당원들의 극단적 혐오증은 공직임기법 위반을 구실삼아 꺼내든 하원의 탄핵카드로 이어졌다. 이를 넘겨받은 상원은 대법원장 주재하에 미국 역사 최초의 탄핵재판을 다루게 됐다.

당시 연방에 편입된 주는 27개였다. 주당 2명의 상원의원이 선출돼 상원 재적의원은 54명이었다. 36표만 확보되면 탄핵이 가능했다. 전체 공화당원 중 6명이 탄핵을 반대했지만 탄핵찬성표는 35표였다. 한 표가 문제였다. 캔자스의 상원의원 에드먼드 로스만 가담하면 간단한 일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입장 표명을 끝까지 미루며 침묵하고 있었다. 캔자스는 공화당의 표밭이었다. 더욱이 로스 의원은 개인적으로 존슨 대통령을 비판하고 있었다. 침묵하는 로스가 탄핵에 동조하리라는 기대와 희망은 당연한 것이었다.

1868년 5월16일. 운명의 날이었다. 재판장이 로스에게 당신의 입장은 뭐냐고 물었다. 답은 ‘무죄(not guilty)’였다. 탄핵이 좌초되는 순간이었다. 이 ‘무죄’ 한마디는 존슨을 탄핵의 질곡에서 풀어줬고, 강경 공화당원들의 ‘의회독재 추구’는 통제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의 삼권분립 원칙이 확고히 자리잡은 계기가 됐다.

탄핵을 좌초시킨 로스에 대한 비난은 눈사태처럼 이어졌다. 뉴욕트리뷴은 ‘겁쟁이 반역자’라고 매도했다. 한 캔자스주 대법원 판사는 “예수를 팔아먹고 목매 죽은 유다의 밧줄은 없다. 하지만 스스로 권총 자결한 짐 레인 의원(또 다른 캔자스 상원의원)의 총구는 아직 살아 있다”는 전문을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존슨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후일 스크리브너스와 포럼지에 기고한 글에서 “나의 선언은 ‘파당적 의회독재’를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탄핵 자체보다는 더 큰 틀인 삼권분립 확립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었다는 역설이었다. 세상은 바뀌어 로스는 미국 정치사에서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한 역사가는 “미국 역사상 어떤 전쟁터에서 발휘됐던 용기보다도 더 어려운 결정을 내린 가장 영웅적인 거취 표명이었다”고 평가했다.

헌재는 최종 결심을 목전에 두고 있다. 헌재 재판관들의 역사적 소명은 크다. 각자 내리는 결정 또한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에 선명하게 기록될 것이다.

양봉진 < 세종대 석좌교수 / 한국사회경영연구원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