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깨우는 한시 (19)] 천권도서공백수(千卷圖書供白首) 백년진구세창랑(百年塵垢洗滄浪)
병자호란 당시 조정 대신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협상이 최선이라는 현실적인 주화파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명분론의 주전파가 대립했다.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주화파였다. 전쟁이 끝나도 후유증은 길었다. 주전파인 신익성(申翊聖, 1588~1644)과 함께 각기 다른 이유로 랴오닝성 선양(瀋陽)까지 잡혀가 억류됐다가 귀국했다. 정치 노선은 서로 달랐지만 비슷한 연배에 여러 가지 경험을 공유한, 그래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뚝뚝 묻어난다.

이 작품의 무대는 신익성의 별장인 백운루(白雲樓)이며 시를 지은 이는 최명길이다. 위치는 두미협(斗尾峽, 팔당댐 근처)이다. 예전에는 두물머리(양수리)에서 서울 광나루까지 흐르는 한강을 따로 두미강(斗尾江)이라고 부를 만큼 지명의 존재감이 적지 않았다. 신익성은 정쟁으로 춘천에 유배당한 부친을 뵈러 오갈 때 한강뱃길을 이용하던 중 이 명당을 발견했다. 만년에 이 자리에 초당을 짓고 원림을 가꿨다. 그는 조경과 건축에도 일가견을 가진 인물이다. 김포에 별서(別墅·별장)를 지은 아버지 신흠(申欽, 1566~1628)에게 배운 안목이다.

신익성은 글과 그림에 능했다. 이 덕분에 그 별장의 풍광을 묘사한 그림이 오늘까지 전해온다. 그림 한쪽에는 승려와 선비가 바위 위에 마주앉은 모습을 양념처럼 보탰다. 1638년 인근 수종사(水鐘寺)에 머물고 있는 계화(戒華)스님이 글을 얻으려 왔던(時有山僧來乞章) 일도 시로 남겨놓았다. 그의 문집 《낙전당집(樂全堂集)》에는 “내가 세속을 끊은 것은 아니나 참선을 좋아하여(吾非絶俗而愛禪)”라고 하면서 마음수행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정쟁과 전란 때문에 오욕(汚辱)으로 점철된 일생이었다. 늦게나마 유유자적하며 백 년의 번뇌를 씻어내는 신익성을 부러워하는 최명길의 귓가에도 “수종사의 경쇠 소리가 새벽달빛에 울리고(水鐘曉磬鼓殘月)” 있었다.

원철 < 스님(조계종 포교연구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