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모르는 세계에 관한 경외감을 경험해 보는 한 해
이맘때가 되면 생각나는 것은 몇 년 전에 다녀온 유럽 여행이다. 겨울이 한창인 새해 초부터 마음먹고 유럽의 오페라 극장 중 10여곳을 골라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다녀왔다. 나만의 오페라 상품을 기획한 것이다. 단출하게 짐을 싸기로 마음먹었지만 겨울 여행 짐의 부피는 알 수 없는 유럽 여행 기간의 희망찬 기대만큼 부풀어 있었다. 낮에는 성당과 미술관에서 보내고, 3일에 한 번꼴로 오페라를 감상하며, 한 해 동안 걸었을 만큼의 거리를 걸어 다녔다. 혼자 한 여행이어서 몽마르트르 언덕 근처의 불량배들, 밀라노로 향하는 열차 안의 집시들 같은 유쾌하지 않은 경험도 여행의 기억 한편에 있지만 화려하고 아늑했던 유럽 오페라 극장들의 따뜻한 조명 색깔과 빈 궁정 성당의 빈 소년 합창단의 하모니는 지금도 아련히 기억에 녹아 있다.

늦은 저녁 무렵 TV를 켜면 홈쇼핑 광고는 여행 일색이다. 가까운 일본에서부터 멀리 유럽과 미주, 호주에 이르기까지 정말 전 세계 곳곳으로 데려다준다. 책과 방송에서만 보던 곳을 전 일정 무료(?) 조식을 제공하는 편안한 숙소와 함께 제공한다고 하니 어서 전화기를 들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는 데에는 돈과 시간 문제 외에도 모르는 세계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망설인다.

세계 여행이라는 거창한 일이 아니더라도 일단 어디든 여행을 떠나면 떠날 때의 설렘만큼이나 돌아올 때 아쉬움도 크다. 이유인즉 모르는 것을 알게 된 즐거움이 너무 짧아서일 수도 있겠다. 다시 그곳을 찾게 되면 반가움은 그 이전의 두 배가 된다. 누군가 여행지에 대한 설명을 해 주면 역사와 이야기로 그 시간의 깊이가 더해지고, 기회가 된다면 심지어 살아 보고도 싶어진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즐거움 때문이고, 숙성된 시간이 들려주는 이야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를 바쁘게 살아 온 우리 앞에 여전히 다가온, 다가올 한 해가 남아 있다. 해가 바뀌었지만 우리의 시간과 삶의 궤적은 여전하다. 굳이 공간적 여행을 떠나기 어렵다면 알지 못하는 시간이 존재하는 공연장은 어떨까? 나를 위해 연주해 주는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이 있는 곳, 굳이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실내악도 좋고 아니면 연극 극장도 좋다.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익숙하지는 않아도 무언가 묘한 감정이 샘솟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공연장의 연주자들이나 배우가 그 시간만큼은 나를 위해 연주하고 노래하고 연기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라이브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묘한 매력이다. 이들은 TV 홈쇼핑처럼 친절한 안내를 준비하고 있지는 않다. 이 때문에 더러는 공연에 실망하고 돌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내가 찾아가서 누리는 공연이 주는 즐거움은 마치 여행처럼, 처음에는 알지 못하는 막연한 두려움이었다가 이내 경외감이 들기도 한다.

긴 시간을 내서 떠날 수 없을 때 조금 적은 시간과 돈을 들여 음악회, 오페라, 연극, 미술관 같은 생경한 풍경 안으로 나를 인도해 보면 좋겠다.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이 없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을지 모른다. 극장에서 내가 보고 듣게 되는 경험이 새로운 친구가 되고 친절이 될 것이다.

해가 바뀌었다. 지인 간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을 나누며 무엇인가 새로운 것, 벅차게 다가올 희망적인 것들을 떠올린다. 올 한 해 삶에 예술의 향기를 깃들일 수 있는 곳을 스스로 찾아본다면, 또 그 시간이 우리에게 행복한 시간이 된다면, 작은 복 하나는 챙기게 되는 셈이다.

이경재 < 오페라 연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