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관료주의라는 전염병
“청문회에 나온 기업인들을 보니 기백이라곤 전혀 없더라.” 일본 기업인들이 한국의 한 사업가에게 했다는 청문회 논평이다. 기업인들이 2, 3세대를 거치면서 창업가정신이 희석된 탓일까. 일각에서는 관료화된 가신들에 의한 포획 가능성을 제기한다.

관료들이 사용한 ‘책상보(bureau)’에서 유래했다는 관료주의. 막스 베버는 이론적·기술적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관료주의의 규범적 특성은 희석되고 부정적 의미로 통용되는 게 현실이다. 책임 전가, 무사안일, 보신주의, 비밀주의, 레드테이프, 획일주의, 법규 만능주의…. 당연히 자발성 자율성 창의성 등은 설 땅이 없다. 관료주의가 어디 정부뿐이겠나. 관료주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곳이 우리 사회에 있을까.

저마다 책임 전가 급급

불길한 예감이 밀려온다. 조지프 슘페터가 언급한 자본주의 종말의 징후를 한국 사회에 대입하면 전혀 낯설지 않다. 기업이 무력화되는 현상부터 그렇다. 혁신조차 매너리즘으로 흐르는 등 기업이 관료화되고 있다는 의구심이 짙어진다. 기업 내에서 실패를 무릅쓰고 도전을 감행하자는 이들보다 경제 비관론 등에 편승해 면책의 탈출구나 찾자는 이들이 득세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건 모두 기업 탓이고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몰아가는 지식인은 또 어떤가. 반기업·반자본주의 담론이 넘쳐나는 게 한국 사회 지식인의 자회상 같다. 국회가 이익집단화되고 포퓰리즘적 입법과 규제를 쏟아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슘페터가 말하는 자본주의 종말의 징후로 부족함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창조적 파괴’를 하는 기업은 ‘공공의 적’이 되기 딱 좋다.

주목할 것은 한국 사회에서 이런 징후가 각기 따로 노는 게 아니라 악순환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의 관료화와 반기업·반자본주의가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증폭시키는 게 그렇다. 반기업·반자본주의는 사회와 정치의 관료화에 다름 아니다.

기업 본연의 길로 가자

개발연대와는 또 다른 정경유착의 진화도 마찬가지다. 정치권은 사고만 터지면 기업에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하지만 어느 일방만으로 유착이 이뤄질 수는 없다. 정치권이 반기업·반자본주의로 기업을 겁박하면서 자신들의 은밀한 요구를 관철해온 건 아닌가. 기업 내 불필요한 대관업무가 절로 확장됐을 리 만무하다. 정경유착의 중개 창구로 비난받는 전국경제인연합회도 그런 과정에서 관료화됐을 건 말할 필요조차 없을 테고.

밖에서는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려면 ‘탈(脫)관료주의(post-bureaucracy)’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눈치 빠른 국가는 재빨리 그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전(全)사회의 관료화’로 질주하는 양상이다.

이대로 가면 한국 자본주의가 주저앉는 건 시간문제다. 누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먼저 끊어야 하나. 정치나 정부는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차라리 기업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게 더 빠른 길일 수 있다. 기업가정신의 본질로 말이다.

차제에 기업이 기부든 출연이든 일체를 다 끊는 것도 한 방법이다. 정치권, 관변단체, 스포츠, 문화예술, 시민단체, 지역사회, 대학, 미디어 등 곳곳에서 곡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혹시 아나, 이게 한국 사회가 기업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될지.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 박사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