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한국의 혼란은 '위장된 축복'
지난달 21일 황교안 국무총리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당선자를 결국 만나지 못했다. 오전 7시부터 낮 12시까지 뉴욕에 머무르며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황 총리가 페루 리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마치고 뉴욕을 경유해 귀국하기로 한 목적이 어긋났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자 측의 입장은 확고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년 1월20일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외부 인사를 만나지 않겠다는 뜻을 고수했다. 트럼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중립을 지키겠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자가 랩가수, 영화배우까지 맨해튼 트럼프타워로 초청했지만 한국 외교당국이 총력을 기울여 추진한 한·미 간 ‘준(準)정상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지난 6일 김기환 뉴욕 총영사는 좀 더 구체적이었다. “한국의 신정부 출범 시기가 앞당겨져 미국의 새 정부 출범 시기와 비슷해진다면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전기가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여부 투표를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김 총영사의 발언은 주미한국상공회의소(코참)가 개최한 송년만찬회 축사 중 일부였다. 당시 한국 기업인이 200명 넘게 참석한 자리였다.

국회에서 탄핵이 결의된 날 월가의 한 투자은행(IB)은 ‘팍시트(parkxit=park+exit)’라는 단어를 담은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올해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를 설명하는 키워드 ‘엑시트(exit)’가 한국 관련 보고서에서 처음 등장했다. 경제활동이 둔화되고, 자신감이 떨어지며, 해외 무역은 위축되고, 구조개혁마저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박 대통령 탄핵 결의에 따른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면 한국의 불확실성을 높인다는 게 보고서 요지였다.

조속히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보고서의 결론은 긍정적이었다.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기초체력)이 견고하고, 과거에도 비슷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전례가 있어 이번 위기를 새 출발과 개혁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했다. 월가에서 ‘위장된 축복’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