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크리스마스 카드에 들어있는 것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다고 했던가. 왠지 어수선한 올 연말에 비해 ‘응답하라 1988’이 금요일마다 방영되던 지난해의 연말은 참으로 촉촉했다. 풋풋한 젊은이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견뎌내는 동네 사람들의 끈끈한 정을 보면서 책장 저쪽 구석에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는 앨범을 몇십년 만에 꺼내 보곤 했다. 이상하게도 우리가 꿈꾸는 사랑의 나라는 앨범 안에는 있는데 지금 여기엔 사라지고 없는 것만 같았다.

마침 작년 이맘때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는 의사이자 시인인 마종기의 시집 제목인데 이 시집에서 영감을 얻어 미술가 안규철이 작품을 발표했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의 나라는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보이지 않는 것인지, 그런 보이지 않는 나라를 미술가는 어떻게 보여주려는지 궁금해서 ‘응답하라 1988’의 많은 팬들이 전시회를 다녀갔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큰 벽 하나를 가득 메운 메모지였다. ‘당신에게 지금 여기 없는 것’을 메모지에 써서 벽에 붙이라는 예술가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은 저마다 손글씨로 무언가를 써넣었다. 벽은 지켜지지 못한 약속, 놓쳐버린 시간, 잃어버린 물건, 헤어진 사람이나 떠난 반려견의 이름으로 채워졌다. 메모 위에 글씨를 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지금 여기 없는 그것의 부재를 기억해냈고 상실한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실감했다.

벽으로 격리된 채 자기 궤도만을 열심히 돌고 있는 금붕어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었다. 커다랗게 둥근 수조는 동심원을 따라 아홉 칸으로 구획돼 있고, 칸마다 금붕어가 한 마리씩 들어 있다. 그런데 이 금붕어들은 다른 칸 속에 있는 동료를 볼 수조차 없다. 게다가 혼자서 아무리 힘겹게 헤엄쳐 봐도 다른 곳으로 넘어갈 수도 없고 번번이 원점으로 되돌아가 있을 뿐이다. 안규철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는 무언가의 부재에 관한 것이었고, 현대인의 고립을 일깨워 준 전시였다. 애정결핍의 사회를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친밀감에 대한 갈망을 강렬하게 불러일으켰다고 할까.

오늘날 개인의 삶은 예전보다 훨씬 능동적인 활동으로 이뤄져 있는데, 사람끼리 친근감의 표현은 반대로 훨씬 소극적으로 바뀌어 있는 게 사실이다. 가끔은 브라질 사람들처럼 만나면 볼 뽀뽀를 세 번이나 해주고, 헤어지기 전에는 포옹하면서 등을 두드려주는 인사법이 부럽다. 한국에서는 반가움이나 칭찬의 표현이 지극히 절제돼 있는 데다 최근에는 성희롱 방지나 부정청탁 예방을 이유로 극도로 표현을 삼가야 하는 경우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장한 일을 해낸 제자에게 기쁨을 어떻게 전할지 몰라서 그저 우물쭈물 서 있는가 하면, 멋지게 차려입은 동료에게 칭찬할까 망설이다가 결국 머쓱해져 버린 경험도 있다. 그렇다고 성희롱이나 부정청탁에 관한 법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거품과 과잉의 행위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의 정서를 원래로 되돌리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건강하고 공정한 사회로 만들기 위해 이런 엄격함은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일 것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선물이나 밥 먹기가 점차 줄어드는 대신에 되살아나는 유행도 하나 있다. 손으로 쓴 크리스마스카드다. 번쩍거리는 선물 포장 속에 파묻혀 있던 크리스마스카드가 이젠 저 혼자 소박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리스마스카드의 속지에는 상대방이 백지 앞에서 첫 글자를 고르기 위해 머뭇거리며 막막한 우주를 잠시 홀로 마주한 그 침묵의 순간이 들어 있다. 어설픈 손글씨를 읽노라면 이것을 꼭꼭 눌러쓰며 한 해 동안의 자신을 돌아봤을 상대방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크리스마스카드 안에는 ‘지금 여기’에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지만 ‘그때 거기’에서의 추억이 담겨 있어 좋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다 의미가 있다.

이주은 <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myjoolee@konkuk.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