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용 칼럼] 우리는 '좋은 사회'로 가고 있는가
영국에서 헨리 8세가 집권하던 1516년 사상가인 토머스 모어가 상상의 섬에 관한 《유토피아》를 썼다.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한창인 시기였다. 화폐가 없고, 같이 일해 공평히 나누며, 민주적으로 지도자를 선출한다는 이 섬, 유토피아는 후대에 이상향의 대명사가 됐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다. 모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꾼 것이다.

이상향에 대한 동경은 동양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의 문인 허균이 쓴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율도국(栗島國)이 그것이다. 중국에서는 시인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시(桃花源詩)에서 묘사되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계곡 안쪽 동굴 너머의 지상낙원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향은 이상향일 뿐이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미국 프랑스 독일로 확산되면서 인류는 전례 없는 생산성의 향상과 경제 발전을 구가했다. 사회는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급변하고, 인구가 공장이 있는 도시로 몰리며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이 생기고 빈부격차는 커져 갔다. 여기서 그 반작용이 생겼다. 공산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공산주의는 1848년 런던에서 열린 공산당 대회 이후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때 공산당 선언문을 작성한 카를 마르크스 역시 모어의 유토피아처럼 이상향을 꿈꿨는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나. 1917년 볼셰비키당이 주도한 10월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가 공산주의화됐지만, 70여년간 지속된 러시아의 공산주의체제 실험은 철저히 실패했다.

세계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3년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턴은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을 썼다. 인도에서 근무하던 영국 외교관들이 폭동을 피해 비행기로 탈출하다 당초 목적지인 파키스탄이 아니라 히말라야 근처에 불시착하면서 샹그릴라라는 낙원을 만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작가는 2차 세계대전 직전의 암울한 현실을 내적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는 신비의 이상향 샹그릴라와 대비시켰다. 현실의 고통에 대한 일종의 도피처를 찾았던 셈이다.

하지만 역사는 아무런 현실적 기반도 없이 꿈꾸는 막연한 이상향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줬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지향해야 할 ‘좋은 사회’란 과연 무엇인가. 미국의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좋은 사회의 조건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던진 바 있다.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고용과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경제 성장이 이뤄져야 한다.” 지속적인 산업 발전과 경제 성장을 통해 일자리와 부를 창출하지 않고서는 좋은 사회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한국은 지금 좋은 사회로 향하고 있는가. 저마다 좋은 사회를 외칠 뿐 정작 성장을 고민하는 사회지도층과 정치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올 6월 개원한 20대 국회는 지난 넉 달간 발의한 규제 법안만 500개가 넘는다. 성장을 독려하고 북돋아주기보다는 오히려 성장의 과실을 먼저 빼먹으려고 안달하는 모습이다. 선진국들은 경제 성장을 위해 법인세 인하 경쟁을 벌이는데 우리 국회는 법인세 인상을 놓고 옥신각신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그뿐이 아니다. 지속적인 성장을 하며 일자리 창출을 하려면 기업하기 좋은 환경과 시스템을 조성하고, 각종 규제를 과감히 철폐해야 하며 노동개혁과 과학기술혁신을 해야 한다. 기업도 좋은 일자리 창출에 더욱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확고한 법질서 유지와 공권력의 확립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사회의 유지·발전을 위한 사회지배구조의 건전성, 구성원의 높은 의식수준 또한 필수적이라고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할 자리에 분열과 갈등이 자리하고 있는 건 아닌가. 권력과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정치인들이 활개를 치면서 모든 것이 정치이념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대한민국이 좋은 사회를 향해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거꾸로 퇴보의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윤종용 < 전 삼성전자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