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알파고와 엡스타인 사장이 보여준 이기는 길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이 대결한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대다수 바둑 기사와 바둑 팬들은 이 9단이 압승할 것으로 생각했다. 컴퓨터의 연산능력이 인간을 뛰어넘은 지 오래라지만 인간에게는 컴퓨터를 능가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둑에서는 이를 ‘기세’ 혹은 ‘승부 호흡’이라 부르는데, 한판의 바둑을 둘 때 일어나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흐름을 이야기한다. 종종 기사의 감정적인 측면과 결합해 강한 승리의 요소가 되는 이 부분이 감정이 없는 컴퓨터에는 없으므로 이 9단이 유리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당시 바둑 진행을 보면 알파고는 마치 이 9단의 감정을 읽기라도 한 듯 의외의 수로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고, 침착한 수로 상대방 기세를 잠재우는 등 인간보다 더 한 판의 바둑에 흐르는 감정을 잘 읽어내고, 이를 이용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힘이 되기는커녕, 한 판의 바둑을 이끌어나가는 데 방해만 되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인간의 감정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커다란 약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앞날을 예측하는 것이 돈이고 권력인 현대 정보화 사회에서 이런 감정의 약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냉정해 보이는 객관적 데이터 분석조차도 인간의 감정이 끼어들면, 전혀 맞지 않는 방향으로 이뤄진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많은 언론사의 여론조사가 맞히지 못한 트럼프의 당선을 ‘구글 트렌드’가 예측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언론사 여론조사는 개개인의 감정을 그대로 조사에 반영하고 이를 감정이 있는 인간이 분석한 결과다. 반면 구글 트렌드의 예측은 인터넷에 올라온 글에 담긴 감정을 데이터화해 이를 감정이 없는 컴퓨터가 분석한 결과다. 구글 트렌드 예측이 더 정확하다는 사실은 알파고가 이 9단에게 승리한 과정과 정확히 닮아 있으며, 정보의 분석에서 감정이 있는 인간의 약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흐름은 승부가 우선시되는 스포츠에서도 보여진다. 올해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시카고 컵스 사장 테오 엡스타인은 108년 만에 ‘염소의 저주’를 깬 일등공신으로 평가받지만, 정작 자신은 감정이 없는 소시오패스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데이터에 따라 선수를 거침없이 사고파는 냉혹한 경영자로 유명하다. 하지만 엡스타인 사장도 정작 영입할 선수를 평가할 때는 그 선수가 가진 ‘인성’을 높은 가치에 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선수가 인격적으로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의 감정적, 도덕적 판단과 무관하게 철저히 데이터에 근거해 그 부분이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인성을 사장 자신의 주관이 아니라 동료 선수나 이전 감독들의 평판을 통해서 얻어진 내용을 데이터화해 하나의 객관화한 능력치로 평가한다. 이런 방식으로 영입한 선수들로 시카고 컵스가 우승을 이뤘다는 사실은 스포츠에서도 감정을 배제하면서 감정을 중시하는 방식이 승부에서 효율적이라고 여겨지는 하나의 예로 보인다.

물론 이런 생각들이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판단할 때 감정을 배제하면서도 감정을 중시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모순된 측면이 있으며, 극한에 이르면 그런 사람을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런 생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고 있는 생각으로, 즉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촛불 집회를 포함한 이번 정치적 상황에서도 정치가들은 어떻게든 대중의 감정을 흔들려고 하면서, 본인과 자기 진영의 감정을 평정하게 유지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중도 그에 대해서 일정하게 감정을 쏟아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감정을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는 본능적으로 혹은 과거 사례로부터의 학습으로 이런 과정이 원하는 것을 얻는 길이라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회 생활에서도 이런 일은 수없이 일어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고 이용하는 사람들도 정작 자신의 감정은 평정하게 유지한다. 이런 방법이 원하는 것을 얻는 데 가장 강력하면서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며,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강병훈 < 서울연마음클리닉 원장·정신과·소아정신과 전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