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기업 한다는 게 '기적'인 나라
“내가 이러려고 기업인이 됐나.” 대기업 총수들도 새벽녘 서울중앙지검 청사를 빠져나오며 이렇게 장탄식했을 것 같다. 정치와 기업의 관계는 5공(共) 때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검찰은 무얼 바라고 이들을 불렀을까. 대통령이 강요했다는, 이참에 대가도 챙겼다는 답을 듣고 싶었을까. 무턱댄 동문(東問)에 총수들은 대통령의 좋은 뜻에 자발적으로 동참했을 뿐이며 대가는 없었다고 서답(西答)을 했을 터다.

성금을 적게 냈다고, 청와대 행사에 지각했다고 그룹을 통째로 날려버린 나라다. 1985년 재계 랭킹 7위 국제그룹 해체 얘기다. 8년 뒤 헌법재판소가 그룹 해체는 위헌이라고 결정한 그날, 수송동 사무실에서 만난 양정모 회장은 “이런 나라에서 기업을 일으킨 내가 바보”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5공 때와의 비교는 지나치다고? 아니다. 대통령과 친인척, 측근들의 행태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따져보라. 직간접적인 비리를 이유로 대국민 사과를 하지 않은 대통령이 있는지. 하물며 드러나지 않은 일은 오죽하랴.

기업들은 대통령의 통치와 퇴임 이후를 위해 돈을 내야 했다.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비자금 마련이 쉽지 않아지자 기금이나 성금, 협찬금 형태로 뜯겨야 했다. 기업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부담하는 준조세가 한 해 20조원 이상이다. 법인세의 절반을 넘는 수준이다. 이런 나라는 없다.

대통령의 치적이라면 ‘묻지마 기부’다. 대북 협력을 위해, 4대강 건설과 녹색성장을 위해, 창조경제를 위해 거금을 쏟아내야 했다. 서민 대출 창구가 높다 하면 돈을 모아야 했고, 중소기업이 힘들다 해도 기금을 출연해야 했다. 청년실업과 전통시장 침체의 책임도 기업이 져야 했다. 홍수가 나고 겨울이 와도 내고, 올림픽을 해도, 대형 사고가 나도 돈을 낸다. 이번엔 문화융성과 스포츠 한류다. 그 돈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래도 내고 또 내야 한다. 지긋지긋하다.

대통령이 독대하자는 데 거부할 간 큰 재계 총수는 없다. 오히려 영광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꺼낸 얘기가 돈이다. 노(No)라 할 수 있을까. 대가를 기대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기업인들은 ‘괘씸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안다. 조금이라도 잘못 보이면 검찰과 국세청이 파고들고 공정거래위원회가 덤빈다. 어떻게 일군 사업인데 그쯤 돈에 송두리째 날려버리겠는가.

대통령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민간 기업의 최고경영자를 몰아내고 해외로 내쫓는 현실이다. 믿어지는가.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한 재계 총수의 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실무자를 불러 확인해도 될 일이다. 검찰은 그런데도 굳이 총수들을 불러 창피를 주고 여론의 뭇매를 유도한다. 이게 무슨 노릇인가. 글로벌 시장을 뛰어다니느라 시간을 쪼개 써도 모자라는 사람들이다. 회사의 업무엔 큰 구멍이 생기고 리스크는 커진다. 그뿐인가. 기업 압수수색과 기업인들의 검찰 출두 사진은 외신을 타고 해외로 퍼져 나간다. 한국과 한국 기업의 이미지는 무엇이 되는가. 자칫 반부패기업으로 낙인이라도 찍히면 해당 기업은 물론 국가 전체가 낭패일 뿐이다.

‘준조세방지법’이라도 발의해 기업이정치의 모금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지금 정치권이 할 일이다. 그런데도 야당은 대기업을 대통령과 공모해 사익을 추구한 국정농단의 당사자들이라며 총수의 공개 소환을 촉구했다. 초록동색(草綠同色) 정치인들이 이런 충동질이나 해대니 반기업 정서는 어떻겠는가.

대통령이 기업인을 독대해 한다는 일이 고작 협찬 요구다. 기업인들을 수시로 만나 애로를 듣고 나라의 미래를 함께 설계한다는 건 먼 나라 대통령 얘기일 뿐이다. 청와대 수석이라는 자들은 여리꾼 노릇이나 하고 있고.

여야가 특검과 국정조사에 합의했다. 내년 4월까지 이어지는 일정이다. 총수들은 그때까지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정치의 희생양 노릇이나 하게 됐다. 무엇 하나 기업 친화적인 건 없다. 한국에서 기업한다는 것을 괜히 기적이라고 하겠는가.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