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공손한 손
단풍이 다 익기도 전에 얼음이 얼었다. 한라산엔 벌써 첫 상고대. 서리를 뒤집어 쓴 나뭇가지들이 창백하다. 때 이른 한파에 전국이 얼어붙었다. 추위보다 더한 냉소와 조롱, 힐난의 칼바람까지 겹쳐 사회 전체가 굳었다. 나라 바깥 시선은 더 차갑다. 결빙의 시절이다.

몸을 움츠리고 점심 먹으러 가는 길. 화톳불을 피우고 언 손을 녹이는 상인들의 표정이 어둡다. 먹는 일조차 사치 같다. 따뜻한 밥공기에 손을 얹으며 생각한다. 무엇이 우리를 급랭의 한기 속으로 밀어넣은 것일까. 고영민 시 ‘공손한 손’이 떠오른다. ‘추운 겨울 어느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하긴 밥이 곧 삶이다. 시인의 은유가 아니어도 밥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진다. 살아서는 익은 쌀을 먹고, 죽어서는 생쌀을 먹는다. 삶과 죽음이 밥 앞에 평평하다. 추운 날 밥뚜껑 위에 공손히 올려놓는 손은 그래서 가장 겸손한 생의 맨살 언어다.

숟가락을 달그락거리며 국을 뜨는 동안 다시 생각한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김종삼 시 ‘장편(掌篇)·2’ 전문)

사정 모르고 소리를 지르는 밥집 영감이 혹 우리는 아닐까. 그 앞에서 태연하게 눈을 반짝이는 소녀에게 10전짜리 두 개는 또 어떤 의미일까. 나라꼴이 한심하다고 종주먹을 들이대는 일이야 누구나 할 수 있다. 아무런 처방 없이 칼부터 들이대면 돌팔이와 다를 게 없다. 칼은 사람을 살리는 메스이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는 흉기이기도 하다. 진짜 어려울 땐 칼질이나 돌팔매를 멈추고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백과 성찰이 필요하다. 잠시 거리를 두는 게 중요하다. 백거이도 ‘달팽이 뿔 위에서 서로 싸운들/ 얻어야 한 가닥 쇠털뿐인 걸/ 잠시 분노의 불길을 끄고/ 웃음 속 칼 가는 것도 그치고/ 차라리 여기 와 술이나 마시며/ 편히 앉아 도도히 취하느니만 못하리’(‘술이나 마시게(不如來飮酒)’)라고 했다. 세상의 먼지가 짙을수록, 나라 안팎이 어지러울수록, 체감기온이 낮을수록 우리 삶의 뿌리를 돌아볼 일이다. 웃음 속에 칼을 품은(笑中有刀) 사람마저도 밥 앞에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는 것을.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