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혁신의 정치학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는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널리 쓰인 어구다. 당시 빌 클린턴이 현직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를 누르고 승리하면서 유명해졌다. 중요한 게 경제라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런데 모든 경제정책이 무력화되는 마당이다 보니 자꾸 의문이 깊어진다. 경제가 굴러가지 않는 게 경제 그 자체 때문인지, 아니면 정치 때문인지. 만약 후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엉뚱한 곳에서 해법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걸림돌은 바로 정치였어!"

클라우스 슈바프 세계경제포럼(WEF) 회장이 한국을 한바탕 휩쓸고 갔다. 그는 역시 4차 산업혁명 장사꾼답게 현란한 어휘력을 구사했다. WEF 조사에서 한국의 4차 산업혁명 준비가 비교 가능한 국가 중 최하위인 25위로 나와서 그런지 어떤 거침도 없었다. 들어보면 우리가 모르는 얘기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게 있다. 바로 정치에 대한 언급이다. 슈바프 회장은 “기술적 진보는 그에 맞는 입법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옛것을 지키려는 정당과 변화의 문을 열고자 하는 정당 간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의도 군상(群像)들이 이 말의 진짜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궁금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4차 산업혁명과 한국 경제의 구조개혁’이라는 정책 세미나를 열었다. 주장하는 건 경제구조 유연화, 규제개혁 등 맨날 그게 그거다. 국책연구소도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지 싶다. 경제 문제에 대한 답은 다 나와 있는데 정치 때문에 막혀 있다고. 그래도 민간 창조경제연구회는 국책연구소보다는 용맹했다. 블록체인이 금융에 국한될 문제냐며 아예 정치적 지배구조 까지 건드리고 나섰다. 사실상 정치혁명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제도권 정치가 내심 뜨악했을 것이다.

미국 경제사학자 조엘 모커는 경제성장의 엔진인 기술 진보를 말하면서 ‘경쟁하는 이웃 국가들의 압력’에 주목했다. 혁신은 언제나 내부 저항에 부딪히기 마련이지만, 정치가 경쟁국이 먼저 새 아이디어를 채택할지 모른다고 위협을 느끼면 그게 내부 저항을 극복하는 강력한 인센티브로 작용한다는 주장이다.

당연히 그런 위협을 무시하는 국가의 흥망성쇠는 역사가 증명하는 그대로다. 영국 역사학자 도널드 카드웰의 이름을 딴 이른바 ‘카드웰 법칙’이다. 이 법칙은 독점적 지위의 강대국에만 해당된다고 말할 수 없다.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모르거나 아예 무시하는 정치가 지배하는 국가가 흥할 리 없지 않은가.

재조명 받는 '카드웰 법칙'

최근 학계에선 ‘혁신의 정치학’이 재조명받고 있다. 혁신을 두고 외부 위협과 내부 저항의 수지 개념까지 등장했다. 정치가 외부 위협보다 내부 저항에 눈을 돌리면 무슨 혁신이 가능하겠나. 제도가 혁신을 위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 제도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정치다. 정당구조와 혁신의 시계(time horizon), 그리고 장기 발전의 상관관계에 주목하는 ‘기술진보의 정치학’도 같은 맥락이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청교도혁명, 명예혁명 등 정치혁명이 선행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과학기술도 경쟁하고, 기업도 경쟁하는데 왜 한국 정치는 다른 나라와 경쟁하지 않는가.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 박사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