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고은의 가슴을 훔친 '아련한'
17세 청년 고은에게 6·25전쟁은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었다. 고향 군산 마을에서 좌우익의 보복학살을 직접 목격하면서 참혹함에 치를 떨었다. 전란이 일어나던 해 10월 어느 날 그는 산 너머 마을에 사는 시인 전옥배를 떠올렸다. 황폐해진 마음을 부여잡고 찾아간 그를 전옥배 시인은 말없이 바라만 봤다. 냇둑을 따라 함께 10리길을 내려갔다. 만경강 하구에 다다를 즈음 사방은 이미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맞은편 강 언저리에는 불빛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다. 전옥배의 입에서 신음처럼 시 한 구절이 흘러나왔다. “망해사는 강 건너 아련한 불빛!” 그 순간 그 ‘아련한’이 고은의 가슴에 천둥이 돼 울렸다.

문학을 꿈꾸던 그에게 다가온 최초의 시어(詩語)였다. 고은 시인은 훗날 자전소설 《나, 고은》에서 “처음 들어본 그 말에서 본능적으로 어떤 ‘황홀함’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그는 2010년 《만인보》를 완간한 뒤 연 기자간담회에서도 이 일화를 소개했다.

시인을 벅차게 한 ‘아련하다’는 똑똑하게 분간하기 힘들게 어렴풋하다는 뜻이다. 한자어로 아는 사람도 많지만 토박이말이다. 멀리 불빛이 가물가물한 것을 아련하다고 한다. 기적 소리가 아련히 들리고, 기억도 오래되면 아련해진다.

요즘은 좀 이상하게 쓰기도 한다. ‘과감한 란제리룩에 아련한 눈빛’이란다. 웬 ‘아련한 눈빛’? ‘아련한 눈물 연기’ ‘아련한 감성 폭발’도 있다. 그런 눈빛이 남심(男心)을 ‘저격’하기도 하고, ‘심쿵’하게도 한다. 말이란 게 세월 따라 뜻이나 쓰임새가 바뀌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어색하다. 혹시 ‘애틋한’ ‘애절한’ 같은 말을 쓰려고 한 게 아닐까? 아니면 한자어 ‘가련(可憐)하다’를 연상해 잘못 쓴 말일지도 모른다. ‘청순가련’은 순수해서 동정이 가도록 애틋한 것을 말한다. ‘아련한’보다는 이게 딱인 것 같다.

토박이말은 살갑고 정겹다. 시나브로, 곰비임비, 는개, 먼지잼, 불잉걸, 미리내, 까치놀, 물비늘…. 감칠맛 나는 이런 순우리말은 비교적 눈에 익었다. 시월드(시댁)니 빼박캔트(빼도 박도 못하다) 같은 거칠고 비틀어 쓰는 국적불명 조어가 넘쳐나지만 그런 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자주 써야 입에 붙는다. 그게 ‘한글 한류’의 저변을 다지는 지름길이다. 지난 한글날 치러진 현대자동차 대졸 공채시험에서 순수 한글 단어를 쓰고 뜻을 풀라는 문제가 나온 게 우연이 아니다.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