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금융의 신뢰회복, 경기회복의 필요조건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 중앙은행의 천문학적 ‘돈 풀기’는 주지하다시피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내고 있다. 왜 이렇게 통화정책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걸까. 일반적으로 완화적 통화정책은 통화량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중앙은행이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본원통화이지 통화량 전체가 아니다. 본원통화는 민간 보유 현금과 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한 지급준비금에 은행의 시재금(時在金)을 합한 수치다.

여기서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통해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항목이 지급준비금이다. 중앙은행이 양적완화 및 신용완화를 통해 민간 보유 채권을 매입할 경우 지급준비금이 늘어난다. 일단 이렇게 늘어난 본원통화는 은행의 대출 활동을 통한 통화 창출 기능을 통해 비로소 통화량으로 연결된다.

본원통화 1원이 얼마만큼의 통화를 창출하는지를 통화승수라고 한다. 미국의 경우 통화량을 M1(민간 보유 현금+요구불 예금)으로 기준을 삼을 경우 통화승수는 위기 전 1.6 중반대에서 현재 0.87로 대략 반토막이 났다. 이는 다시 말하면 금융위기 이전에 비해 두 배의 본원통화를 늘려야 같은 통화량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힘들게 증가시킨 통화량이 명목 국내총생산(GDP)으로 귀결되기 위해서는 돈이 ‘돌아야’ 한다. 돈이 도는 속도를 화폐유통속도라고 하며 이 수치를 통화량에 곱한 값이 GDP다. 그런데 유통속도 역시 위기 전 10.7에서 현재 5.74로 역시 대략 반토막이 났다. 결론적으로 중앙은행이 본원통화를 1달러 증가시킬 경우 과거에는 17달러의 소득 증가를 가져왔지만 현재는 5달러에 불과한 것이다.

금융은 통화승수 및 화폐유통속도 양쪽에 모두 관계되지만 특히 상업은행은 대출을 통해 통화량을 창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통화승수를 결정하는 금융회사로 여타 기관과 차별화된다.

그런데 금융위기가 이들 상업은행을 포함한 금융회사의 과도한 위험 추구 및 도덕적 해이로 인해 발생하다 보니 일명 볼커룰로 불리는 도드-프랭크법과 바젤Ⅲ 등 규제가 한층 강화되면서 이들의 통화 창출 기능도 동반해서 약화된 것이다. 이로 인해 경기 회복을 위해서는 금융회사, 특히 상업은행의 대출 기능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므로 규제를 완화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유진 파마를 비롯한 시카고학파의 일부 경제학자와 공화당이 이런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는데 도드-프랭크법의 대체 입법으로 ‘금융선택법(Financial Choice Act)’을 제안했다. 이 법안이 이달 초 하원 상임위원회에서 통과됐는데 하원 본회의 투표에서도 통과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상원에서 기각될 가능성이 높고 통과되더라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정(금융위기)-반(규제)에서 이제 ‘합(合)’으로 가는 과정에 있다고 해석되고 있다.

규제의 정도는 경제학 학파에 따라 의견이 다를 만큼 가치 판단의 문제다. 따라서 규제완화를 위해서는 금융회사에 대한 신뢰 회복이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미국의 웰스파고은행은 고객 동의를 받지 않고 몰래 1500만개의 계좌를 개설하고 56만개의 신용카드를 발급해 부당하게 수수료를 챙긴 사실이 발각됐다. 이로 인해 은행은 약 1억9000만달러의 과징금을 부과받았고 직원 5300명이 해고됐다. 작년에는 바다 건너 영국의 바클레이즈은행이 슈퍼리치들의 자금 원천에 대한 검사를 하지 않고 거래내역을 숨겨 5200만파운드의 커미션을 챙긴 문제로 7200만파운드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올 들어 영국에서는 평균 15초마다 한 건의 금융사기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는데 이는 작년 같은 기간 대비 50% 정도 증가한 수치다. 금융권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 이런 식이면 ‘과도’하다고 여겨지던 규제 역시 합리화될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은행의 통화 창출 기능은 떨어져 경기 회복은 늦어질 수밖에 없다. 금융권의 신뢰 회복이 경기 회복의 필수조건인 이유가 이것이며 한국 역시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안동현 < 자본시장연구원장 ahnd@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