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금형 제도가 퇴직연금 질적 성장 돕는다
최근 인구고령화 문제가 가계부채 문제보다 훨씬 풀기 어려운 과제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만큼 고령화 문제가 국가적인 파급력을 지닌 난제임을 의미한다. 한국은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지만 준비는 매우 미흡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노인빈곤율이 50% 수준으로 불명예스러운 1위라는 통계 지표가 이를 대변한다.

이처럼 노인빈곤율이 높은 이유는 근복적으로 연금제도에 의한 노후소득 보장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공적연금인 국민연금만으로는 적정 수준의 노후소득보장이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진국처럼 우리도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이라는 사적연금을 통해 보완적 노후소득보장 기능을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 정부도 이 문제를 인식하고 2005년부터 퇴직연금을 도입하고 사적연금 활성화에 힘써왔다. 특히 퇴직연금은 도입 10년 만인 2015년 말 적립금이 126조원을 넘어서는 등 근로자 노후보장의 중요한 축으로 순조롭게 성장 중이다.

그 이면에는 퇴직연금제도와 관련한 많은 문제점이 내재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금융감독원 통계에 의하면 2015년 300인 이상 대기업의 도입률은 84.4%인 데 비해 300인 미만 중소기업의 도입률은 17.3%에 불과하다. 현재의 계약형 퇴직연금구조 하에서는 노사의 참여 저조 및 전문성 부족으로 퇴직연금사업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근로자 목소리가 반영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저금리시대가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리금 보장상품에만 치우친 자산운용 등 수익률 하락, 대·중소 기업 간 도입 격차 지속 등의 문제점도 제기돼 왔다.

학계나 연구기관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해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도입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이런 차에 정부에서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도입을 위한 법안을 입법예고했는데 이는 퇴직연금제도의 질적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조치로 크게 환영할 부분이다.

사용자로부터 독립된 기관(수탁법인)을 설립해 퇴직연금제도를 운용하는 구조라는 점에서 기금형 제도는 지배구조상 기존 계약형 제도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고된 제도가 정착되면 노사의 제도 선택권 및 근로자 수급권 강화, 중소기업의 퇴직연금 도입확대 측면에서 질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중소기업은 여러 기업이 하나의 퇴직연금 기금을 구성해 일본식 연합제도를 운영한다면 정보 부족 및 규모의 경제 문제를 크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기금형 제도를 성공적으로 도입한 호주는 인구가 2250만명으로 한국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입자가 1400만명에 이르고, 적립금은 1700조원 수준으로 자국 국내총생산(GDP)을 훌쩍 넘어선다. 이에 비해 한국은 인구 5160만명 중 가입자가 590만명에 불과하고, 적립금은 GDP의 8% 수준으로 선진국에 훨씬 못 미친다.

내년도 예산안이 처음으로 400조원을 넘었다고 한다. 그중 보건·복지·노동에 해당하는 부분은 올해보다 5.3% 늘어난 130조원으로 정부 지출의 32.4%를 차지한다. 퇴직연금 제도를 통한 근로자 개인의 노후소득 보장강화는 앞으로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국가의 복지분야 재정부담을 완화할 것이다. 정부는 그만큼 미래 성장동력을 확충하는 데 주력할 수 있다.

지금 첫발을 내딛는 기금형 제도가 ‘신탁(trustee)’ 문화가 일천한 우리 금융 토양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제도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평가를 통해 수정 보완해 나가야 한다. 제도의 주체인 노사뿐만 아니라 연구기관 및 금융회사 등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 퇴직연금제도는 근로자들의 장기적인 노후소득보장 강화를 위해 함께 키워나가야 할 나무로 비유되는 사회적 공유가치이기 때문이다.

방하남 < 한국노동연구원장·전 고용노동부 장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