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컨트롤타워는커녕 산업정책조차 없으니
1990년대 초, 매물로 나온 범양상선을 삼성이 인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건희 회장에게 직접 물을 기회가 있었다.

“범양은 벌크선사 아닙니까. 관심 없어요. 우리 제품을 수출하는 컨테이너선사라면 모를까….”

그의 해박한 식견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컨테이너선 속도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빨라야 15노트 아닙니까. 크기도 기껏 3000TEU이고. 턱도 없어요. 앞으로 물동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그러면 1만TEU는 넘어야 할 것이고, 속도도 두 배는 넘어야지요. 원가 경쟁력을 생각해보세요. 그때라면 한 번 해볼까요. 허허.”

1만TEU라는 크기는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던 시절이다. 조선사들이 4000TEU급 컨테이너선을 수주했다고 환호성을 지를 때였으니 말이다. 되돌아보면 정말 대단한 혜안이었다.

그리고 20여년이다. 미래는 이 회장이 내다본 그대로 도래했고, 그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국내 양대 컨테이너선사는 모두 몰락하고 말았다. 그 같은 인물이 해운업계에 없었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해운업계 공멸이 어디 기업인만의 책임이겠는가. 미래를 한 치도 내다보지 못하긴 정부도 마찬가지다. 컨테이너선의 대형화를 전혀 예측하지 못해 신·증설한 부두를 10년도 안 돼 죄다 뜯어고친 정부다. 이런 안목으로 구조조정에 덤벙대더니 물류대란이 터지자 경영권을 잃은 해운사 대주주부터 잡겠다며 몽둥이질이다.

해운산업을 흔히 ‘커맨딩 하이츠’라고 한다. 경제와 산업을 지탱하는 기간산업 중의 기간산업이라는 뜻이다.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60%에 육박하고, 그 수출 물량의 99.7%를 배로 실어 나르는 나라다. 그런 산업에 비상벨이 울린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도 손을 놓고 있더니 한진해운을 법정관리에 넣으면서 물류대란은 생각조차 못했다고 떳떳이 말하는 정부다.

해운산업 문제를 칼럼으로 짚은 게 2014년 초 이후 벌써 세 번째다. 그때마다 해운업계 원로들에게 물었다. 그들의 제언은 일관적이었다. “첫째, 한 회사만큼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 국적선사가 없으면 수출경쟁력이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둘째, 한 회사를 그냥 없애라는 게 아니다. 두 회사를 하나로 합쳐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한 회사를 무턱대고 없애려들다간 물류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진다. 셋째, 두 회사를 합병한 뒤에는 선박펀드 등을 동원해 서둘러 대형 선단을 꾸리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러면 충격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이런 얘기를 들어나 봤는지 모르겠다.

하긴 대한민국에 산업정책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7~8년 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물망에 오르내리던 분을 만나 산업정책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공업발전법이 폐지된 뒤 에너지나 자원을 제외하면 지경부 역할은 끝났다고 봐야지요. 기술개발 자금이나 배분하는 부처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한 건 아니잖습니까. 정부 부처는 이제 컨설팅 펌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기술과 시장을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해 민간을 지원하는 것이지요. 지금 정부는 산업이나 기업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제대로 된 산업정책이 나올 리 없지요.”

조선산업도 그런 경우다. 관료들은 몇 년 전만해도 중국이 쫓아와도 조선산업만큼은 2020년까지는 끄떡없다고 장담했다.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하던 그 순간에도 그나마 버틸 수 있던 조선사들마저 중국이 아닌 국내 ‘좀비 조선소’들의 분탕질에 경쟁력을 뿌리째 잃고 있었다.

정부에 산업 구조조정의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점을 탓한다. 그러나 정작 심각한 건 산업에 대한 이해와 정책의 부재다. 산업과 기업을 알지 못하는데 무슨 일을 하겠는가. 해양수산부 장관은 커맨딩 하이츠가 몰락하는 데도 139일을 팽목항에 눌러앉아 수염을 길렀다. 산업부 장관은 조선 철강 등 핵심 제조업이 붕괴하는데도 뜻도 모를 ‘창조경제’와 ‘제조업 혁신 3.0’만 외치다 국회로 향했다. 산업 구조조정이 산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