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깨우는 한시 (5)] 산부재고유선즉명(山不在高有仙則名) 수부재심유용즉령(水不在深有龍則靈)
창덕궁 낙선재에는 아직도 조선왕실의 향기가 남아 있다. 1989년까지 영친왕 부부, 덕혜옹주 등 왕족의 후예들이 머무른 곳이다. 물론 몇몇 상궁과 나인도 함께 살았다. 현재 전하는 궁중음식은 당시 낙선재를 부지런히 드나든 요리연구가들의 발품과 땀의 결과라고 한다. 대부분의 궁궐은 빈집으로 바뀐 지 오래다. 하지만 낙선재 구역에는 여전히 왕가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1960~1970년대 허름한 민가로 이뤄진 서울 성북동 북창마을도 마찬가지다. 동네 가운데 독립운동가요, 시인인 만해 한용운 선사(1879~1944)가 만년에 머무르던 심우장(尋牛莊)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게다가 지금 살고 있는 주민들의 훈기까지 더해지면서 외지인의 발길을 부르는 도심의 명소로 탈바꿈했다.

명산고찰의 템플스테이와 전통마을의 종가집을 찾는 것은 주인장(스님 포함)들이 대대로 그 공간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적 민속촌과 고궁의 관광으로만 채워지지 않는 온기를 머금었다. 집도 집이지만 결국 사람의 유무에 따른 차이라 하겠다. 인향만리(人香萬里)라고 했던가. 사람의 향기는 만리까지 퍼진다.

당나라 때 ‘시호(詩豪·시의 대가)’로 불리던 유우석(劉禹錫, 772~842)은 안록산의 난 이후 안후이(安徽)성 변방으로 좌천됐다. 직책은 통판(通判)이다. 난세에 감사(監査)라는 소임은 있으나마나 한 한직에 불과했다. 관사(官舍)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야말로 누실(陋室)이다. 그럼에도 “누추한 집이지만 덕의 향기로 감쌀 것(斯則陋室惟吾德馨)”이라고 장담했다. ‘누실명(陋室銘)’을 통해 자신을 명산의 신선과 명천(名川)의 용에 비유하면서 스스로 위로했다. 물론 머무는 사람의 격에 따라 집의 격 역시 바뀌기 마련이지만.

원철 < 스님(조계종 포교연구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