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성공 확률 낮을수록 성장의 근육은 커간다
2012년 ‘도둑들’과 ‘광해, 왕이 된 남자’, 2013년 ‘변호인’, 2014년 ‘명량’, 2015년 ‘베테랑’, 이 다섯 편 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평소 영화를 좋아한다면 금세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천만 영화’ 대열에 선 영화들이다. 내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나와 우리 회사가 마케팅을 담당한 영화라는 것이다. 나의 직업은 ‘영화 전문 마케터’다. 영화와 사랑에 빠진 어린 시절부터 줄곧 영화 관련 일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꿈을 꿔왔고, 운 좋게도 영화 마케터를 업으로 오랫동안 영화와 끊임없는 ‘밀당’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에서 영화는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문화 콘텐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과 소통하는 창구이자 가교 역할을 하는 영화 마케터는 대개 음지에서 일할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1000만명 이상의 흥행을 달성하면 흥행 과정을 궁금해하는 인터뷰 요청을 종종 받는다. 그리고 매번 “어떻게 1000만명을 달성하게 됐는가”라는 질문을 빠짐없이 받고는 한다.

솔직히 답하자면, 흥행 공식의 정석은 누구도 확신하기 어렵다. 대신 어느 시점부터 “어떻게 해야 더 잘할 수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꾸준히 질문하는 것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 질문에 가까스로 찾은 답이 있다면 어려운 숙제를 푸는 법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나를 키운 8할의 필모그래피를 대라고 한다면 나는 1000만 영화보다 먼저 ‘추격자’ ‘내 아내의 모든 것’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감시자들’ ‘검은 사제들’ ‘곡성’ ‘아가씨’ 같은 작품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흥행 결과로만 따지면 이 영화들은 400만~6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성공한 영화’로 오인받기 쉽다.

하지만 이 영화들이 출발선에 섰을 때 충무로는 이들의 성공을 확신하지 않았다. 한 번도 흥행한 적 없는 마이너한 소재, 검증되지 않은 신인 감독, 스타 캐스팅의 부재 등 다양한 선입견이 작용하면서 이들은 흥행 공식에 부합하지 않는 작품이라고 쉽게 판단됐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결국 관객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주는 영화로 사랑받았을 뿐 아니라, 한국 영화산업의 다양성을 확장시킨 개성 있는 작품들로 가치를 창출해내는 반전을 일궈냈다.

흥행 수치와 성장곡선은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공 확률이 낮을수록, 소통의 솔루션을 찾기 어려울수록 그 과정 속에서 성장의 근육이 커간다. 내게도 그 성장의 발판이 있었기에 관객과의 소통과 교감 속에서 보람과 희열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마주할 수 있었다. 까다롭고 풀기 어려운 영화에 기꺼이 도전하고, 사고(思考)의 고통을 즐길 때 비로소 영화도 인생도 한 뼘씩 성장한다는 아주 단순하고 값진 교훈과 함께 말이다.

한 차례 비와 태풍이 지나가고 이제 새로운 계절이 시작된다. 얼마 남지 않은 한 해, 미뤄놓은 풀기 어려운 숙제가 있다면 오늘 시작해보면 어떨까. 1등도 신기록도 좋지만, 풀기 어려운 숙제에 도전하는 사람을 응원해준다면 우리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여름의 끝자락이다.

이윤정 < 영화전문마케터, 퍼스트룩 대표 1stlook@1stlook.co.kr >